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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내 친구모임 단골손님 된 남편

등록 2006-04-04 18:05수정 2006-07-12 16:02

2050 여성살이 /

남편은 내 친구들 모임에 자주 끼어든다. 언제부터인지 내가 여자들끼리 영화를 보러 가거나 점심 모임에 갈라치면 남편은 덩달아 외출 채비를 했다. 때론 난감했다. 친구들은 내게 “남편을 떼놓고 오라”는 주문까지 하곤 했다. 그래도 우리가 주말 부부임을 감안해 대놓고 박대하진 못했다. 남편이라고 왜 이런 눈치를 모를까? 그는 우리 집에 내 친구들이 모일 때를 ‘작업 데이’로 삼았다. 직접 원두를 드륵드륵 갈아내 커피를 대접, 친구들 사이에서 ‘갈갈이’란 애칭까지 받았다. 또 전공을 살려 새로 나온 네트워크 관련 기술 브리핑을 해주기도 했다. 상대의 경계심을 풀며 한발짝 다가서는 전술. 다들 알면서도 속아주었다.

재밌는 건, 그가 진짜로 여자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남자들은 대한민국 정치와 정치인들 이야기까지 바닥나면 곧장 술판이다. 여자들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차 한 잔과 와인 한 잔이면 수다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눈가 잔주름 관리부터 변비 대책, 조직과 가족 내 인간 관계 컨설팅, 남편 흉보기와 자식들 이야기까지. 그 뿐인가? 초란 만들기나 소스 요리법 또는 최근 개발한 맛집 채점까지 우리들은 배가 다시 고파질 때까지 떠들어 댄다.

대부분 남편은 듣는 쪽이다. 때론 이의를 제기하며 남성들의 행태를 변호하려다 벌집이 되기도 한다. ‘왕수다 클럽’ 참관 횟수가 늘수록 남편은 “배운 게 많다”고 말한다. 친정 부모를 섭섭하게 대하는 남편을 둔 친구의 불평에 문득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사춘기 아이들에 대처하는 다른 아버지의 방식을 배울 수 있어 도움이 된다나. 또 시집 식구들과의 관계 때문에 생긴 홧병이 여성들의 류머티스 관절염이나 자궁 내 근종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걸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조직 내 주류인 남성들이 비주류 여성 구성원들에게 의도하지 않고도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고 한다.

국가와 민족과 조직을 이야기하며 거의 평생을 보내는 남성들은 ‘사소한 디테일에 광분’하는 아내들에게 짜증을 낸다. 거대담론에 익숙한 그들에게 여성들의 관심사는 하찮게만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남북관계와 지방분권 뿐 아니라 하루하루의 식단과 아이들의 내신 성적에 대한 고심이 공존하는 일상을 살아간다.

최근까지 남편은 여성들의 출산 기피 풍조를 비판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저출산이 사교육비 문제뿐 아니라 가정 내 여성노동에 대한 고질적 저평가 구조와 어떻게 맞물려 있나를 파악하게 되었다 한다. 이래저래 내 친구들을 몽땅 자기 친구로 삼은 내 남편은 이 모임에 나름대로 ‘기여’할 방법도 찾아냈다. 혼자 사는 친구집의 고장난 인터넷 복구를 돕고, 삐걱대는 문틀도 고쳐준다. 서울 외곽에 집을 마련한 친구에겐 어린 사과나무를 선물하기도 한다. 어느덧 그는 나와 함께, 그리고 내 친구들과 함께 나이들어가는 보너스를 즐겁게 누리는 듯하다.

박어진/ 자유기고가 behappy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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