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암 수술 뒤 떠밀리듯 전역
내달 국방부 심사 실낱 기대
“끝까지 남아 불합리 바꿀 것”
내달 국방부 심사 실낱 기대
“끝까지 남아 불합리 바꿀 것”
30일 민간이 되는 피우진 중령 /
24시간. 이제 딱 하루가 남았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군 헬기 조종사로 유명한 ‘불사조’(호출명 피닉스) 피우진(51·사진) 중령. 그가 30일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간다. 27년만이다. 23살이던 1979년부터 지금까지 반생을 꼬박 군에 바치고도 명예로운 전역식을 하지 못한다. 마지막 근무지인 항공학교에서 병원으로 이송됐다가 곧바로 전역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한스럽지요.” 피 중령은 담담하게 말했다.
피 중령은 여군 헬기 조종사이며 최초의 항공병과 여성 교관으로 유명하다. 최근엔 전역 문제 때문에 유명세를 더 탔다. 그는 지난 9월, 암 병력과 신체 일부가 없다는 이유로 전역 조치를 받았다. 유방암에 걸려 수술을 하는 김에 멀쩡한 나머지 유방까지 모두 잘라낸 일이 문제가 됐다.
군인사법 시행규칙 별표에 따라 암 병력 또는 유방절제술을 받으면 전역 대상이 된다. 그는 이미 암 완치 판정을 받았고, 유방 없이 활동하는 데도 문제가 없어 군에 남길 바랐다. 그런데도 심신장애 2급 판정으로 전역 명령을 받았다.
“‘여성의 상징’이라는 유방이 군인인 나에게는 화근덩어리였다”고 그는 말했다. 신체 검사를 받을 때 “여군 조종사들 가운데 누구의 가슴이 더 크더냐”며 수군거리던 남군들의 야릇한 표정도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가슴에 압박 붕대를 칭칭 감기도 했고, 늘 꽉 조이는 속옷을 입고 다녔어요. 유방을 절제하고 홀가분하게 남은 군생활을 더욱 열심히 하자고 생각했지요.”
보상을 규정하는 상이등급을 판단할 때는 ‘활동에 지장이 없다’며 최하위인 7급을 받았다. 활동에 지장이 없는 것을 군이 스스로 인정하면서 다른 한편 장애등급을 낮게 매겨 전역시키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미군 역사상 최초의 흑인 장애인 수석잠수부인 칼 브레이셔(Carl Brasher)는 다리가 절단되고도 군복무를 하면서 역사를 새로 썼다. 반면 피 중령은 가슴이 없다는 이유로 군에 남아있을 수조차 없다.
30일, 전역식은 아니지만 그를 아끼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여 작은 위로연을 해주기로 했다. 최근 펴낸 에세이 <여군은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다>(삼인)의 출판 기념회도 겸하는 자리다. 책에서 그는 군대 내 성차별과 성희롱의 문제를 다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대위 시절 술자리에 자신의 부하인 여군 하사관을 보내라는 4성 장군과 맞선 일, 사단장의 여군 성희롱 사건 때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군대 문화에 대한 그릇된 ‘관성’을 질타한 일 등이 대표적인 일화다.
여군의 현실도 과장됐다고 지적했다. 드라마 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아름답고 여유로운 여군의 모습은 현실에 없다고 밝힌다. 이라크에 파병 나가는 여군 애인을 위해 남자 친구가 꽃다발을 들고 버스를 세울 수도 없고, 그 꽃다발을 받아들고 파병을 포기하는 여군의 낭만도 없다. 여군에겐 남군과 다름 없는 규칙이나 훈련이 있을 뿐이다. 더욱이 ‘여성성’까지 유지해야 했다.
“제가 훈련받을 때 여군 사관 후보생은 좀더 우아하게 보여야 한다며 파마 머리를 하고 내무반 밖에서는 꼭 화장하고 다니라고 했어요. 미스코리아 양성하듯 우아함과 신비성을 바라는 분위기였죠.”
책이 나오기 전부터 12월 열릴 국방부 인사소청심사에 악영향을 끼칠까 우려하는 이들이 많았다. 반면 여군의 실상에 대해 알려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그는 “내 에세이와 인사소청심사는 완전히 별개 사안”이라며 “국방부가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리라 믿는다”고 했다.
그동안 군대는 많이 변했다. 전과 달리 여군 장교라도 결혼과 출산을 할 수 있으며, 심지어 출산 휴가까지 쓰게 됐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불합리한 규정은 변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제 최종 결정을 남기고 있다. 12월의 국방부 인사소청심사가 마지막 희망이다.
여기에서 통과되지 않는다면 행정소송까지 할 참이다. 군인사법의 구태를 알리는 23일간의 국토종단을 하면서도 그는 내내 ‘빨간 마후라’를 벗지 않았다. 그 길은 혼자만의 고집이 아니라 선후배와의 약속이기도 했다. 그는 “선배인 고 엄옥순 대령이 암에 걸렸을 때 구태한 법이라며 소송을 준비중이었지만, 그가 전역하고 나서 원위치됐다”며 “나는 끝까지 남아 바꿀 것”이라고 했다.
“함께 복무하던 여군 지휘관 5명 가운데 3명이 암에 걸려 두 사람은 이미 고인이 되고 저만 완치해 남았습니다. 저 같은 후배가 이제 다시는 나오지 말아야죠.”
글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사진 삼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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