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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바람난 남편을 연민하는 아내

등록 2007-07-02 18:33

박어진의 여성살이
박어진의 여성살이
박어진의 여성살이 /

한 친구가 한밤중에 아파트 베란다에서 소곤소곤 통화하고 있는 남편의 휴대폰을 빼앗아들었다. 평소와 너무 다른 목소리의 톤으로 미뤄 사태를 직감했다는 그녀. 당황한 남편은 변명했다. 특별한 사이가 아니라고. 그러나 아내의 센서, 이 보다 더 정확할 순 없다. 배신감으로 머리끝에 피가 몰리고 한바탕 악다구니가 시작될 국면, 그만 맥이 풀렸다.

“미안해. 내가 당신에게 꽃이어야 하는데. 너무 오래 동지로만 살았어. 미안하다.” 느닷없는 사과에 친구의 남편은 더욱 허둥지둥, 오해하지 말아달라는 말을 계속했다.

아이 하나를 낳으며 20여 년 계속된 결혼이었다. 결혼 당시 빚에 찌들린 시댁 때문에 얼굴이 그늘져 있던 남편. 친구는 팔 걷고 나섰다. 채권자들을 직접 상대해 가며 담판을 지었다. 자신의 월급을 빚잔치에 털어 넣으면서도 하하 웃었다. 사랑하는 남편의 가족 일이니 아까울 게 없었다. 친구는 남편의 일감을 끌어오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기까지 했다. 남편은 성실하고 유능했다. 이제 모든 게 안정되고 세상 부러울 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시작된 그 남자의 사랑.

“나는 너무 오래 투사처럼 살아온 것 같아. 남편한테 여자로 보일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 남편이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없으니 사랑인들 어찌 변하지 않을까. 그렇더라도 사랑은 때로 많이 억울하다. 십년 전이었다면 어쩜 격렬하게 대처했을 상황. 친구는 담담했다. 남편에게 몇 달의 시한을 주고 관계 정리를 요청했다는 그녀. 만일 안 되면? 그건 그 때 가서 생각하겠단다.

대한민국의 법과 관습과 도덕이 때로 과잉보호하는 아내라는 지위. 그 기득권을 순식간에 빛바래게 한 건 무엇이었을까? 남편의 마음은 어디론가 날아가 꽂혀 버렸다. 친구는 홀로 남겨진 듯 외로웠다. 빚과의 전쟁에서 거둔 승리. 그러나 새 전쟁은 승산이 적다. 설령 이긴들, 화살처럼 날아간 마음을 제 자리로 돌릴 수 있을까? 남편의 가슴을 설레게 한 그 여자를 질투했다는 그녀.

사랑으로 시작되지만 결혼은 아주 오래되면 종종 혈연관계화된다. 배우자가 이성이 아니라 그저 피붙이처럼 느껴진다. 이 단계에 이르면 그 계약의 전제였던 배타적 성실의 이행을 그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오십고개를 넘으며 가슴앓이를 하는 남편을 바라보는 친구의 시선. 그것은 연민이다. 그리고 연민은 사랑보다 힘이 세다.

박어진 칼럼니스트/behappy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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