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네트워크 활동가 우효경
2050 여성살이 /
얼마 전 외국인 여성들의 눈으로 한국을 바라보는 토크쇼 프로그램에서 한 일본인 여성이 “나와 자주면 학점을 잘 주겠다”고 한 성희롱 강사를 고발하여 화제가 되었다. 다행히 그 강사는 해당 대학에서 면직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한국에서 대학을 다닌 여대생으로서 이 사건을 지켜보며 한 일본인 여성의 고발이 한국 사회에서 가지는 파문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그녀의 발언이 방송에 나가고 난 뒤 많은 네티즌들이 그녀가 일본인임을 문제삼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관련된 기사 밑에는 “외국인이 한 이야기를 어떻게 믿느냐”라거나 “위안부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일본인 여자의 권리를 찾아주느냐”라는 등의 댓글이 심심찮게 달려있다. 이런 주장들의 저변에는 이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은 한국 남자들의 불편함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일본인 여성의 고백은 사건의 진위 여부를 떠나 ‘믿을 수도 없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나라 망신으로 탈바꿈하고 마는 것이다.
과연 이 일이 일부 사람들이 자신들의 불편함을 점잖은 방식으로 표현하듯이 방송에서 폭로할 것이 아니라 학교와 상담을 거치고 차근차근 풀어낼 일이었을까? 해당 방송은 이미 논란이 되었던 여성의 발언을 학교 측이 해결할 일이라고 보고 재방영에서 삭제했다. 그러나 대학 내 성폭력 사건은 어쩌다 터진 외국인의 충격 고백과 같은 일이 아니다. 이번 사건은 그녀가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국제적인 망신을 두려워한 대학이 시급히 조치를 취했지만, 실상 한국의 대학은 성폭력 무법지대이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아서도 안된다는 한국의 아름다운 미풍양속은 성폭력 교수들에게는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다. 교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반성폭력 교육과 처벌 방안이 제대로 담보되지 않는 지금의 현실에서 피해자가 성폭력을 문제제기하려면 그 부담을 고스란히 자신이 감내해야만 한다. 학점에서 불이익을 받게 되는 것은 물론 가해자는 계속 교단에 서고 피해자만 대학을 떠나야 하는 기막힌 결과도 있다.
한 여성의 용감한 고백은 그것이 비록 상업적인 오락물에서 다루어졌다고 한들 ‘신빙성’과 ‘나라망신’을 이유로 감추어져서는 안 될 일이다. 오히려 오락물에서조차 이런 이야기가 등장한다면 그 실상은 더욱 끔찍한 것이 아니겠는가. 여전히 몇 년 째 성폭력 교수와 법정에서까지 싸우는 여대생들이 있고 이것이 눈 돌려서는 안 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어서 빨리 진정으로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효경/paramilta@hanmail.net
‘2050 여성살이’에는 그동안 ‘여성살이’를 써온 박어진씨와 언니네트워크 활동가인 우효경씨, 〈나도 한때는 자작나무를 탔다〉를 쓴 소설가 김연씨가 필자로 참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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