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영이씨
“조선인 강박, 힘들지만 삶의 뿌리”
‘조총련 간부’ 아버지 탓 초·중·고까지 조선학교
조선대 중퇴·몰래 미국 어학연수·한국인과 결혼
“부모님과 조국 아닌 조국, 대한민국 방문해요” “아버지가 일제 식민지 시대 때 강제로 일본에 끌려왔어요. 전라도가 고향인데 지금도 많이 그리워하세요.” 한국 환경재단과 일본 피스보트가 함께 마련한 ‘피스 앤 그린보트’ 행사에 일본 쪽 통역요원으로 참가한 엄영이(31)씨. 그에게 처음부터 선택은 없었다. 조국은 북한, 고향은 남한, 살아가는 삶의 터전은 일본. 총련 간부였던 아버지 때문에 엄씨는 어린 나이부터 ‘강한 조선인’으로 키워졌다. 의무적으로 초·중·고교를 조선학교에 들어갔고, 조선대학을 다녀야 했다. 해방 이후 일본에 있는 대다수 조선학교는 북한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조선학교에 다니는 재일동포들의 ‘조국’은 북한이었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없었어요. 조금의 의심도 없이 당연히 조선인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워낙 동포 사회의 규모와 영향력이 커 든든한 울타리 같았어요.” 그런 엄씨가 조금씩 변해간 것은 대학 때다. 내면에 감춰져 있던 자유로운 이상과 꿈들이 엄씨 자신조차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을 움직였다. “그런 느낌 아세요? 너무 공부하고 싶은 마음, 제겐 영어가 그랬어요. 이념과 사상을 뛰어넘는 감정이었어요.” 엄씨는 칼을 뽑았다. 주어진 운명보다 감정이 움직이는 대로 살아야 행복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1997년 아버지 몰래 조선대학을 2년 만에 그만뒀고, 이후 2년 동안 돈을 모아 ‘적의 나라’ 미국으로 갔다. “지금도 부모님께 너무 죄송해요. 그분들의 피맺힌 삶을 누구보다 잘 알거든요.” 하지만 그의 삶은 그의 것이었다. 엄씨는 미국에서 6개월 어학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북한이 아닌 남한에 취직해 한국어를 익혔고 지금은 한·미·일 3개 국어 통역일을 한다. 그러다가 한국 남자와 결혼까지 했다. 아이가 벌써 세 살이다. 가장 힘든 게 뭐냐고 물었다. “조선인이라는 민족적인 강박이요. 항상 조선인이라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하고 행동해야 해요. 조금 어긋났다 싶으면 죄책감이 들어요. 삶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죠. 그런데 그게 또 내 삶의 뿌리예요. 아주 복잡하고 이상한 감정이죠.” 그래도 엄씨는 이런 복잡한 자신의 존재 때문에 “늘 삶을 깊이 있게 돌아보며 산다”고 했다. 지난 14일 일본 도쿄를 떠난 ‘피스 앤 그린보트’는 러시아 캄차카를 거쳐 24일 사할린에 도착했다. 오랜 항해에도 피곤한 기색이 없는 엄씨는 올해 안에 부모님과 함께 ‘조국이면서 조국이 아닌 대한민국’을 방문할 예정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사할린/김소연 기자 dandy@hani.co.kr
조선대 중퇴·몰래 미국 어학연수·한국인과 결혼
“부모님과 조국 아닌 조국, 대한민국 방문해요” “아버지가 일제 식민지 시대 때 강제로 일본에 끌려왔어요. 전라도가 고향인데 지금도 많이 그리워하세요.” 한국 환경재단과 일본 피스보트가 함께 마련한 ‘피스 앤 그린보트’ 행사에 일본 쪽 통역요원으로 참가한 엄영이(31)씨. 그에게 처음부터 선택은 없었다. 조국은 북한, 고향은 남한, 살아가는 삶의 터전은 일본. 총련 간부였던 아버지 때문에 엄씨는 어린 나이부터 ‘강한 조선인’으로 키워졌다. 의무적으로 초·중·고교를 조선학교에 들어갔고, 조선대학을 다녀야 했다. 해방 이후 일본에 있는 대다수 조선학교는 북한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조선학교에 다니는 재일동포들의 ‘조국’은 북한이었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없었어요. 조금의 의심도 없이 당연히 조선인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워낙 동포 사회의 규모와 영향력이 커 든든한 울타리 같았어요.” 그런 엄씨가 조금씩 변해간 것은 대학 때다. 내면에 감춰져 있던 자유로운 이상과 꿈들이 엄씨 자신조차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을 움직였다. “그런 느낌 아세요? 너무 공부하고 싶은 마음, 제겐 영어가 그랬어요. 이념과 사상을 뛰어넘는 감정이었어요.” 엄씨는 칼을 뽑았다. 주어진 운명보다 감정이 움직이는 대로 살아야 행복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1997년 아버지 몰래 조선대학을 2년 만에 그만뒀고, 이후 2년 동안 돈을 모아 ‘적의 나라’ 미국으로 갔다. “지금도 부모님께 너무 죄송해요. 그분들의 피맺힌 삶을 누구보다 잘 알거든요.” 하지만 그의 삶은 그의 것이었다. 엄씨는 미국에서 6개월 어학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북한이 아닌 남한에 취직해 한국어를 익혔고 지금은 한·미·일 3개 국어 통역일을 한다. 그러다가 한국 남자와 결혼까지 했다. 아이가 벌써 세 살이다. 가장 힘든 게 뭐냐고 물었다. “조선인이라는 민족적인 강박이요. 항상 조선인이라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하고 행동해야 해요. 조금 어긋났다 싶으면 죄책감이 들어요. 삶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죠. 그런데 그게 또 내 삶의 뿌리예요. 아주 복잡하고 이상한 감정이죠.” 그래도 엄씨는 이런 복잡한 자신의 존재 때문에 “늘 삶을 깊이 있게 돌아보며 산다”고 했다. 지난 14일 일본 도쿄를 떠난 ‘피스 앤 그린보트’는 러시아 캄차카를 거쳐 24일 사할린에 도착했다. 오랜 항해에도 피곤한 기색이 없는 엄씨는 올해 안에 부모님과 함께 ‘조국이면서 조국이 아닌 대한민국’을 방문할 예정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사할린/김소연 기자 dand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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