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장 로비에 비치된 투명 사물함을 활용해, 피해여성에게 전하는 격려의 메시지를 사물함 안 체인에 거는 ‘마음 주고받는 책갈피’ 행사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정유경 기자 edge@hani.co.kr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
“왜 내가 입을 다물어야 하는지…가해자는 저렇게 당당하게 살고 있는데, 나는 왜 주변의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고 말하기조차 어려워해야 하는지….” 피해자들은 정작 말하지 못하고, 가해자들은 “재수가 없어 걸렸다”거나 “당할 만 했다”는 식으로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범죄가 있다. 바로 성폭력이다.
그러나 성폭력 피해자들이 달라지고 있다. 피해자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눌려 말하지 못했던 여성들이, 이제 떳떳하게 “나는 피해자”라고 ‘커밍아웃’하게 된 것이다.
지난 3일 홍대 KT&G상상마당 라이브홀에서 열린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언중유희’에서는 ‘성폭력 생존자’들이 무대에 올라 자신의 경험을 들려줬다. 이 날 무대에 오른 4명의 ‘생존자’들은 간혹 목이 메이기도 했지만, 관객들의 박수에 힘입어 끝까지 이야기를 풀어냈다. 관객은 130여명으로 실내가 꽉 찼다. ‘생존자’들은 “말하기를 통해 고통을 인정하고, 치유할 수 있게 됐다”고 입을 모았다.
이날 ‘성폭력 말하기 대회’는 완전개방형으로 치른 첫 행사다. 대회는 지난 2003년부터 시작해 올해로 5회째다. 5년 전 처음 할 때는 성폭력 피해경험을 지닌 소수의 여성들만으로 관객을 짰다. 그 뒤 조금씩 진화해, 방청객을 제한했던 지난 대회들과 달리 이번에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게 했다. 그래서 이번 행사에는 남자들도 30여명이나 참석했다. 이런 행사는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등지에서는 이미 15년 전부터 ‘스피크아웃 데이’(Speak out day)’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바 있다.
올해 행사에서는 ‘성폭력 생존자’가 여성주의 인디 뮤지션들과 함께 작사, 작곡한 노래를 부르는 등 새로운 형태의 말하기도 시도됐다. 엄숙하고 침울한 분위기보다, 치유와 삶에 대한 긍정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이와 별도로 조직한 ‘말하기 모임’도 호응을 얻고 있다. 상담소는 지난 4월부터 매달 마지막 수요일 저녁에 성폭력 피해경험을 말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모임에는 매회 10~20여명이 참석한다. 이윤상 부소장은 “회원제로 꾸리는 모임이 아니어서 처음에 잘 될지 걱정했으나, 생각보다 많은 여성들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여성들이 자신의 성폭력 피해 경험을 블로그를 통해 털어놓으며 서로 ‘트랙백’하는 활동도 최근 활발하다. ‘지하철에서 겪은 일’ ‘여자분들 조심하세요’ 등의 고백형 글이 주로 20~30대 여성들이 자주 찾는 블로그에 인기 글로 자주 오르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9월 메타블로그 사이트인 ‘이글루스’에서는 한 누리꾼이 올린 성추행 경험담이 400여개의 추천을 받아 메인화면에 올랐으며, 이를 계기로 성범죄 경험 고백이 부끄러운 일인가에 대한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렇듯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성폭력 피해 말하기’에 나서는 이유는 뭘까. 행사를 기획한 성폭력상담소의 활동가 이산씨는 “말하기를 통해 피해여성 스스로 치유할 뿐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로 사회를 변화시키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유경 기자 edge@hani.co.kr
정유경 기자 ed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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