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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내 청춘의 동지 ‘토지’

등록 2008-05-15 22:33

우효경/칼럼니스트
우효경/칼럼니스트
2050 여성살이
얼마 전 소설가 박경리씨가 별세했다는 기사를 보니 마음이 묘하다. 나는 굳이 따지자면 바람에 지는 가랑잎에 눈물 흘리던 문학소녀라기보단 입시 열풍을 뚫고 살아남은 ‘논술 소녀’였지만, 어쨌든 <토지>는 닭장 같은 독서실 한구석에서 보낸 내 열일곱 청춘의 동지이다.

<토지>는 항상 국어 선생님들의 추천 도서 목록 위쪽에 있던 책이었다. 그러나 국어 교과서도 읽기 벅찼던 우리였기에 학교 도서실의 <토지>는 항상 1권만 빌려갔거나 너덜너덜해진 채 돌아오던 책이었다. 나는 자율학습 시간에 손에 땀을 쥐고 읽고 있던 <퇴마록>을 선생님께 압수당한 뒤, 압수당하지 않으면서도 긴 책을 찾기 시작했고 그렇게 <토지>를 읽기 시작했다.

열일곱 살의 나는 <토지>를 읽고서야 한국 여성도 그렇게 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태백산맥>, <임꺽정>, <삼국지> 같은 유명한 대하소설들은 대부분 남성들의 격동의 드라마와 불꽃 같은 서사를 그리지 않았던가. 물론 이런 소설들에 여성들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고 나도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작품 속의 여성들은 어디까지나 정치적이고 야망에 찬 남성들의 조연에 불과했다.

반면 <토지>는 ‘심각하고 정치적이며 길기까지 한 대하소설은 남성들의 몫’이라는 나의 혹은 사회의 편견을 깨뜨려 준 작품이었다. 어떤 면에서 ‘여류 작가’라는 말은 단순히 작가의 성별을 표시할 뿐만 아니라 ‘사랑 타령만 하는 가벼운 글을 쓰는 작가’이라는 불쾌한 꼬리표로 쓰이기도 한다. 심지어 한국에서 더 이상 대하소설이 나오지 않는 현상을 여성 작가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글을 읽은 적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제까지 박경리씨에게 ‘여류’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사람들을 잘 보지 못했다. 그녀가 예외로 취급받는 것은 이런 분류가 여성들이 하는 일을 일반화하고 가치절하하는 사회의 편견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토지>는 좁은 독서실에서 정석을 성경처럼 읽어야 했던 열일곱 살의 나에게 서희처럼 온갖 세상의 풍파가 닥쳐도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갈 것을 가르쳐 주었다. 박경리씨가 세상을 떠난 뒤 많은 작가들이 그들의 선생님을 추억하고 있지만 난 오직 그분을 책으로만 접했을 뿐이니 감히 선생님이라 칭하지는 못하겠고 그저 그런 멋진 책을 써준 것을 고마워하는 독자로 늦은 팬레터를 쓴다. 열일곱 살의 나에게 <토지>는 참 큰 의미가 되어주었습니다. 고마워요.

우효경/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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