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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어느 모녀의 ‘음식 혁명’

등록 2008-05-22 18:42

김연/소설가
김연/소설가
2050 여성살이
어느 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이스크림 가게 앞을 지날 때 우리 모녀가 나눈 대화.

“이 회사는 배스킨과 라빈스가 만들었는데, 배스킨이 쉰몇 살에 죽고 라빈스도 병으로 시달렸대. 라빈스의 아들은 아이스크림에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닫고는 채식주의자에 환경운동가가 됐다는군. 어마어마한 유산도 포기하고 말이야.”

“헐! 미친 거 아냐? 그 돈 나나 주지. 난 아이스크림 짱 좋아하는데….”

“그만큼 이 유혹적인 아이스크림 속엔 비밀이 많다는 거지.”

“뭐는 먹어도 되고?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고 모르는 게 약이라고 말한 사람이 누군데?”

어미는 말을 잃고, 기권승한 딸은 갖가지 색깔의 아이스크림 앞에서 뭘 고를까 눈빛이 초롱초롱 빛났다.

그래도 때때로 할 말을 잃을지언정 딸이 과자와 음료수를 고를 때마다 꿋꿋이 그 유해성에 대해 떠들었다. ‘철없는’ 것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제철 채소·과일에 신토불이 철학으로 몸에 좋다는 것들만 먹으며 건강하게 살아 보려고 눈물겹게 노력했다. 하지만 호환·마마보다 더 무섭다는 공포의 병에 전면적으로 시달리다 보니 이제 “암조차도 두렵지 않다”고 호언할 만큼 소심한 내가 대담해지고 있다.

그런데 정작 딸이 음식혁명을 선포했다. 라면을 끊고, 햄버거도 먹지 않겠단다. 딸의 이런 혁명 열기에 동참하느라 생전 처음 열무김치를 담갔다. 우리 모녀는 올여름을 시원한 열무국수로 나게 될 전망이다. 식탁 위에는 육식의 종말이 도래하고 난 다시 젊어질 듯싶다. ‘나 돌아갈래!’라고 기찻길 위에서 소리치지 않아도 세상이 ‘백 투더 퓨처’ 해서 나를 30년 전 청춘으로 돌아가게 하고 있다.


그 옛날, 우리 자식들에게만은 이런 세상을 물려주지 말자고 누군가 타는 목마름으로 날선 구호를 외쳤을 때 속으로는 내 평생 결혼할 일은 없을 거고 더구나 자식은 꿈도 꿀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세상 일 장담할 것 하나 없다’는 어른들 말씀대로 그 오달졌던 청춘이 결혼도 해 봤고 자식도 낳았다. 허나 세상에 이런 일이! 내가 앉아 있던 콘크리트 바닥에 이제 내 딸이 앉아 있다. 5월 중간고사에서 딸이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과목은 사회였다. 이유를 물으니 책에서 배운 민주주의와 현실이 너무 달라서 공부하기가 싫었단다. 진실 조사차 애의 사회 책을 펼쳐 보다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딸이 써 놓은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낸 6월 민주항쟁’, ‘국가 부당행위, 혼자서라도 싸워야죠.’ 달라진 교과서가 그나마 이 땅의 ‘어른’에게 체면치레는 해 주었지만 자식 앞에만 서면 하염없이 작아지는 고약한 세월이다.

김연/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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