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어진/칼럼니스트
2050 여성살이
초파일 오전 9시, 지하철 옥수역 출구 밖에서 친정엄마를 만나기로 했다. 얼마 전부터 다니기 시작하신 절 정수암에 같이 가는 날이다. 저만큼서 손을 흔들며 아장아장 걸어오시는 여든두 살 엄마. 걸음걸이뿐 아니라 웃는 얼굴도 갈수록 아기같이 천진난만한 ‘살인 미소’다. 멀리 프랑스 땅 엑상 프로방스라는 곳에 사는 아들과 며느리를 위해 연등 하나를 큰맘 먹고 밝히시겠단다. 이름·나이·주소가 적힌 쪽지에다 봉투 하나를 건네니 연등 접수 끝. 법당으로 향한다. 법회를 주재하시는 비구니 스님께서 부처님의 생애를 총정리해 20분간 발표하신다. 그분이 오신 지 벌써 2552년이 되었단 말인가? 휴우.
찬불가로 시작해 <반야심경>까지, 모두들 입을 모아 법당 오른쪽 큰 화면에 비춰진 구절들을 따라 읽는다. 남성 신도들이 드문드문 섞여 있긴 하지만 신도들은 거의 다 여성들. 그것도 40대 이상 연령대다. 합창단도, 장내 정리를 맡은 자원활동가도 모두 그렇다. 법회 도중에도 들어오는 신도들. 쌀 한 봉지에 초 한 개, 꽃 한 송이를 불전에 올리는 그녀들의 옆얼굴이 경건하다. 우리의 머리 위엔 이미 누군가의 딸들과 아들들의 이름이 적힌 수박꽃등이 즐비하다.
법회장보다 붐비는 공양간 한 귀퉁이. 나물비빔밥 한 그릇에 된장국을 받아 엄마랑 마주앉는다. 고추장 한 숟갈 듬뿍 넣어 쓱쓱 비벼 먹는 절밥, 올해도 꿀맛이다. 맛있게 먹는 나를 바라보는 엄마가 웃으신다. 내가 맛있어야 엄마도 맛있으신 거다. 가슴이 찡하다.
사랑하되 집착하지 말라고, 사랑하되 연연하지 말라고 부처님과 높은 스님들은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연연하지 않음은 엄마의 길이 아니다. 내 뱃속에 담아 세상에 내놓은 자식들, 그 무한 책임의 대상들에게 어찌 연연하지 않겠는가? 연연하면 깨닫지 못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 이번 생에 꼭 깨달아야 하는 건 아니다. 자식에게 연연하고 아파하면서도, 욕심과 화, 그리고 어리석음에 묶인 우리 존재의 현실을 직시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새끼들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살아온 엄마들이 밝힌 연등이 밝아온다. 깨달음에 이르진 못하더라도 자신을 이미 낮춘 엄마 부처님들의 염원을 담은 연등. 때로 외롭고 애달팠던 그녀들의 연등 빛이 세상을 밝히지 않는가?
박어진/칼럼니스트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