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형 할인마트에서 계산 업무를 하는 여성 노동자가 선 채로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서비스 산업에서 판매 업무를 하는 여성 노동자들 대부분은 서서 일하고 있다. 전국 민간서비스산업 노동조합연맹 제공
김경희(38·여·가명)씨는 외국계 화장품 회사 ㅇ사의 판매직원이다. 서울 시내 백화점에서 오전 10시30분 ㅇ사 매장이 열리면 저녁 8시 문 닫을 때까지 10시간 가까이 거의 꼬박 서 있어야 한다. 손님이 없어도 앉아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앉아 있으면 불친절하다고 평가하니까 어쩔 수 없죠. 고객을 응대하는 모습을 평가하는 팀이 몰래 매장에 들러서 살피곤 해요.” 때문에 하지정맥류를 심하게 앓아 산업재해 인정을 받은 동료도 있다.
프랑스에 있는 본사 매장을 방문했을 때 김씨는 놀랐다고 했다. “손님을 기다린다는 이유로 서 있는 사람은 없었어요. 다들 앉아서 전표 처리 등 자기 할 일을 처리하고 있더군요.” 하지만 우리나라는 딴판이라는 얘기다. 유독 판매직원들에게 과잉 친절을 강조하다보니, 선 채로 일해야 하고 또 손님이 아무리 험한 말을 해도 웃음 띤 얼굴로 대하는 ‘감정 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서비스 직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600만명 가량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들은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제대로 존중받지 못해 왔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백화점·할인매장 등에서 서서 일하는 서비스 노동자들이 ‘건강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단적인 사례다.
한국여성노동자회, 전국민간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 50여 노동·여성·보건단체들이 급기야 지난 22일 ‘서서 일하는 서비스 여성 노동자에게 의자를’ 국민캠페인단을 출범시켰다.
캠페인단이 화장품회사 판매직 여성 노동자 613명에게 물어 본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9시간 이상 서서 일한다는 응답자가 88%를 넘었다. 이 가운데 12시간 이상 서서 일한다는 이는 11%나 됐다. 응답자들이 첫 손가락에 꼽은 바람은 ‘아픈 다리 문제 해결’(41.5%)이었다. 응답자 가운데 장시간 서서 일하면 생길 수 있는 하지정맥류 진단을 받은 이도 11%나 됐다. ‘매장에 의자 놓기’가 매우 시급하다고 캠페인단이 보는 이유다.
산업안전보건법의 시행규칙에 “지속적으로 서서 일하는 노동자가 근무하는 동안 때때로 앉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는 의자를 비치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지만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의자가 아예 없거나, 의자를 놔 두고도 앉지 못하는 게 대부분 매장 근무여건이기 때문이다.
하지정맥류 진단을 받은 한 할인매장 여성 노동자의 다리에 파란 정맥이 맨눈으로 볼 수 있게 부풀어올라 있다. 원진노동환경건강연구소 제공
ㅇ사에서도 2005년 노동조합이 꾸려지고야 판매직원들의 노동 환경이 조금 나아졌다고 했다. 단체협약에 ‘서비스수당’이 신설됐다. 판매직원들이 ‘감정 노동을 하고 있음’을 회사가 인정해 수당을 주기로 한 것이다. 오후 간식 시간(30분)에도 쉬기는 쉽지 않았지만, 그나마 유급으로 전환된 것도 이때다. 김씨는 “앉아서 쉴 권리가 있다는 것 자체는 인정받았다”며 “앞으론 더 나아지지 않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김씨가 아직 실제로 앉아서 쉴 수는 없는 분위기다. 김정연 노동부 근로자건강보호과 사무관은 “사업장 지도·점검을 강화하고, 걸터앉을 수 있는 입좌식 의자를 두도록 지원하는 방안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앉지 못하는 현실’은 이들 서비스 노동자의 알려지지 않은 숱한 문제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캠페인단 설문조사를 보면, 화장품 판매 노동자들은 하지정맥류 말고도 성대 결절(12%), 안구 건조증(45.8%), 우울증(9.7%) 등의 진단을 받은 적이 있다고 호소했다. 윤간우 녹색병원 전문의(산업의학)는 “손님에게 끊임없이 말을 해야 하거나, 환한 조명 아래서 하루종일 일하는 노동조건이 성대 결절, 안구 건조증 같은 질환으로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정민정 민간서비스연맹 여성부장은 “고객 서비스를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마땅히 보장돼야 할 노동자 권리마저 묻히고 있다”며 “재해를 겪고도 산업재해라는 인식을 하지 못하는 서비스 노동자들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윤금순 전국여성연대 대표는 “마트·백화점을 찾는 고객 견지에서 생각해 봐도, 노동자가 행복해야 고객이 받는 서비스도 좋아지는 것 아니겠냐”며 “고객들도 서비스 노동자들의 권리를 지지해 주는 것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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