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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모녀의 명절놀이

등록 2008-09-18 18:07수정 2008-09-18 19:43

김연/소설가
김연/소설가
2050 여성살이
이번 명절도 무사히 잘들 보내셨습니까? 혹,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는 분은 없으시겠지요? 저도 한때 그런 시절이 있었네요. 꼬리에 꼬리를 문 차 안에서 차가 더 많이 밀리기를, 아예 길 위로 모든 차들이 딱 달라붙어 목적지인 시댁이란 곳에 이르지 않기를 소망하던 그런 시절이.

그 뒤, 제 명절은 달라졌습니다. 비디오를 산처럼 쌓아 놓고 밤새 영화 보기로. 딸애마저 제 아비 편에 보내고 혼자만의 명절놀이를 듬뿍 즐겼지요. 몇 해 뒤, 엄마가 넌지시 그러시더군요. 별일 없으면 명절은 집에 와서 보내라. 못 이긴 척 합류했습니다. 실은 그간의 명절 트라우마가 치유된 빈자리에 외로움이 기웃거리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노련한 엄마가 철없는 딸 맘을 읽으신 거죠.

올해는 연휴가 짧아 귀향하지 않았습니다. 딸과 저는 각자의 방에서 용맹정진하다 연휴 끝자락에 서울로 가는 기차에 올라탔습니다. 애는 제 아비를 만나러, 저는 화가 부부이신 멘토를 찾아뵈러. 한 분이 병원에 입원하셨으니 다른 한 분은 병상을 지키고 계셨지요. 갑작스레 큰일을 치르셨음에도 두 분 다 여전히, 아니 더욱 맑아 보이셔서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습니다. 소박하면서 파격적인, 겸손하면서도 당당한, 구도자이면서 전복자인 두 분 선생님께 이번에도 역시 기를 많이 받았습니다.

종로의 극장에서 재회한 딸과 <맘마미아>를 봤습니다. 딸은 영화가 시작되기 전 엄중히 경고했죠. “노래 따라 하지 마!” 지난해 여름 런던에서 퀸의 명곡들로 만든 뮤지컬 <위 윌 록 유>(We will rock you)를 보다가 노래 따라 한다고 둘이 대판 싸운 적이 있거든요.

하지만 지금의 딸만한 나이였을 때 ‘끼고’ 살았던, 그들의 고향 스웨덴까지 찾아갔던 제가 ‘나의 아바’ 앞에서 어찌 돌부처처럼 굳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예의가 있는데 말이지요. 주옥같은 노래들과 명대사 속에서 우리 모녀를 가장 뭉클하게 한 대사는 싱글맘 엄마의 바로 이 말, “자기들이 딸을 위해 뭘 했다고 여길 나타나?” 제가 통쾌하게 웃음을 터뜨리자 딸도 큰 소리로 킥킥거리더군요. 우리 모녀 사이로 만볼트의 전류가 흘렀습니다.

휘영청 둥근 보름달 길을 따라 집으로 왔습니다. 제가 선언했죠. “엄마는 올해부터 달님한테 소원 안 빌어! 쓸 만한 남자 하나 보내 달라고 지극정성으로 빌었는데 이게 뭐냐고?” “달님, 전 입고 잘 긴 바지가 없어요. 잠옷 하나 선물해 주세요.” “잠옷 바지? 참, 소원 한 번 현실적이네!” “엄마도 빌 걸 빌라구! 달님이 들어줄 수 있는 현실 가능한 것으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우리 모녀의 명절이 딱 이번 한가위만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김연/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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