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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블로그] 주체적 여성으로서의 나는 어디쯤?

등록 2009-11-19 11:11

나는 아직도 내 자신을 미완성의 인간으로 본다. 특히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한마디나 가슴 저 밑에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내 이성과는 전혀 다른 것일 때, 혹은 전혀 기대하지 않은 내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나는 내 자아의 미완성도에 크게 혼란스러워 하고 좌절한다.

내가 가장 혼란스러워 하는 내 모습중 하나는 바로 '주체적 여성으로서의 나'의 모습이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한다.

나는 2녀 중 장녀이기에 별로 남녀차별이란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자랐다. 그저 '고추'하나 더 달은 아들이 있다고 부모님을 은근 뭉게던 친척들은 있었지만, 난 그 집 고추들보다 공부도 더 잘했고 야물딱졌고, 그랬기에 내가 '아들'이 아닌 '딸'이라서 부모님에게 미안했던 자격지심은 추호도 없이 자라났다.

그러나 조금 더 자라 날 지켜주던 울타리 밖으로 고개만 조금 기웃 거리자 이야기는 달라졌다. 고등학교 시절 넉넉한 집 막내딸로 청소시간에 청소도 제대로 못하는 공주였던 친구가 사실 해외여행 간 엄마를 대신해 오빠 밥을 해주고 손으로 양말을 빨아줘야 해서 같이 못 놀겠다고 한 이야기를 듣고 놀란적도 있었고, MT가서 삼겹살 파티 후 여자들이 뒷정리를 하는 동안 티비보고 있던 남자들에게 남자도 다 같이 설거지 해야 한다고 말하는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던 시선도 느꼈고, "그냥 내가 더 많이할께. 쟤네 그냥 둬"라고 말하며 나를 저지하던, 그래서 나를 더 이상하게 만들던 동기 여자애들을 만난 적도 있었다.

아빠, 나는 내가 원하는 대통령 뽑을꺼야.

내 '주체적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에 가장 큰 충격을 준 일은 지난 대선때였다. 우리나라에서 매우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지역에서 자라나신 우리아빠는 대선을 앞두고 온 가족을 모아두고 말씀하셨다. "우리가족은 모두 기호2번으로 통일하자. 기호 2번 뽑아라." 첫 투표권 행사에 들떠있던 나는 0.1초도 생각하지 않고 바로 아빠에게 대답했다. "아빠, 나는 내가 원하는 대통령 뽑을꺼야. 그 사람이 될 가망 없어도 상관없어. 근데 참, 아무리 아빠라도 딸들한테 누구한테 표를 줘라 하는건 민주주의에 어긋나는 거 아냐?" 항상 딸들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해 왔던 우리아빠는 순간 얼굴 표정이 굳어졌고 더 이상 아무 말씀도 않으셨다.

난 이성적으로는 매우 옳은 대답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아빠 표정을 보고 가슴 저 아래부터 알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아 그냥 알겠다고 하고 안뽑으면 그만인데, 왜 그런말을 했지?'

그러나 충격은 그 다음이었다. 그날 한 친구에게 아빠와 나눈 대화 이야기를 하며, 그렇게 아빠에게 쏘아붙인것에 죄책감이 든다고 했다. 그러자 친구가 깔깔 웃으며 내게 말했다. "그러게, 넌 가끔 그렇게 이상하더라. 난 우리아빠가 뽑으라는 기호 2번 뽑았어." 친구는 자기 언니도 아빠 말대로 기호 2번을 뽑았고, 자기네 자매 뿐 아니라 우리의 또 다른 친구 하나도 그렇게 했다고 말했다. (지난 대선 때 왜 기호2번을 뽑은 대학생이 많았는가는 여기서 설명되지 않을까 싶다.)


당시 난 정말 혼란스러웠다. 자기 의견을 가진 당당한 여성이 되라는 교육을 받아 자라났는데, 학교 밖을 내다보니 당당한 여성의 자리는 없을 뿐더러 이상한 시선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내가 남자였어도 당당히 아버지에게 난 다른 후보를 뽑을꺼라고 말 한것이 이상한 일이었을까? 아니면, 강하게 자기 주장을 펼치 줄 아는 진짜 사나이가 되었다고 꿀밤을 맞을 지언정 아버지를 은근 행복하게 해주었을까?

나는 분명 울타리 안에서는 '남성과 동등한 주체적인 여성'으로 자라났는데, 울타리 밖을 보니 '약자인 주제에 애교도 없는 기지배'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생각 끝에는 '아무래도 세상 쉽게 살려면 없는 애교라도 연마해서 조용히 묻어가는게 좋을 것 같다'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런 내가 한국 밖을 나오니 그 혼란은 가중되었다. 한국에선 그렇게 조금 'too much'로 분류되었던 내가, 한국 밖에만 나오면 주체적인 스웨덴, 미국 여대생들을 보고 '쟤네 좀 무섭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한국 티비에서 여자연예인이 '한번쯤 바람 안피는 남편이 어디있겠어요. 그래도 모른척 해줘야죠.'라고 버젓이 말하고 이에 박수를 받는 모습을 보고 학교를 왔는데, 여기 여대생들은 클린턴 섹스 스캔들이 터졌을 때 힐러리가 '남편을 믿는다'라고 말하고 지나간 것에 대해 영부인으로서 여성 인권을 무시한 모델을 제시한 것이라며 열변을 토하는 모습을 보았다. (클린턴 스캔들 터졌을 때 우리 학교 국어선생님은 힐러리가 여성이자 엄마로써 '매우 현명한 결정'을 한 것이라고 말 했었다.)

그 외에도, 여기서 외로울 것이라며 주말에 함께 여자 축구를 하자는 친구에게 나도 모르게 손사래를 치며 '여자축구?'라고 놀란 표정을 지어본 적도 있고, 아이 셋 낳고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며 아직 젊은 날을 다 못 즐겨서 헤어져야겠다는 스웨덴 여자 이야기를 듣고는 나도 모르게 '아휴..그 여자 좀 그렇다'라고 했다가 모두를 어색한 침묵속으로 빠뜨린 적도 있다.

과연 내 주체적 여성으로서의 자아는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 나는 과연 하나의 인간으로써 주체적인 여성인가, 아니면 아직도 지난 오랜 사회가 만들어 놓은 굴레 속에 있는 '비(非)남자'인 여성일 뿐 인가? 분명 저 어딘가 그 교집합에 위치해 있는건 알겠는데, 앞으로 결혼을 하고 사회구성원이 되고 아이들의 엄마가 되었을 때 과연 부끄럽지 않은 여성이 될 수 있을지, 또 부끄럽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이 서지 않는건 사실이다.

외국 생활을 하면서 힘들 때는, 언어가 통하지 않을 때가 아니라 이렇게 전혀 다른 환경에서 내가 몰랐던 나를 만날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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