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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2050 여성살이] “네 엄마가 바로 꿈순이란다”

등록 2005-06-14 16:34수정 2005-06-14 16:34

“너, 미쳤구나.” 친구가 말했다. 지난번에 쓴 글을 보고였다. “일하고 싶어 미치겠다는 글을 올리다니. 너 전업주부들이랑 남자들한테 칼침 맞고 싶어 환장했냐?” 뭐 그러고 싶어 환장한 건 아니고, 그냥 솔직히 말했던 거 뿐인데? 그러고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옛날 고리적 일이 생각나서였다.

옛날옛날 한 옛날에, 전업주부들이 드글드글한 카페에서였다.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던 게 틀림없다. 속내를 드러낸 글을 올렸으니까. 내용은 그랬다. “일이 너무 좋다. 행복하다. 남편과 연봉 경쟁하는 기분도 째진다.” 지금 생각하면 입에 칼을 물고 인당수로 뛰어들어도 유분수지 싶다. 내 입에 칼이 물린 줄도, 내가 뛰어드는 곳이 꽃밭이 아니라 칼밭인 줄도 몰랐다. 당장 그 글에 리플이 주르륵 달렸다. “전업주부는 뭐 불행한줄 아냐?” “남편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주고, 애를 키우는 행복만한 게 있는 줄 아느냐?” 그야말로 황당함이 정수리를 휘감아 한참 웃었다. 아니, 왜들 이러시나. 내가 남들 전업주부 하는 걸 싸잡아 욕하길 했나? 아니면 여자들이여, 자기 일을 가져라. 일 없으면, 바보! 이러고 궐기 대회라도 열길 했나? 난 단지, 내가 하는 일이 좋다고 고백한 것뿐이었다. 아이 키우는 재미, 살림 하는 재미가 너무 좋아. 누군가 이렇게 말할 때, 난 일하는 게 너무 좋아. 이렇게 말한 거였다.

내가 보기에 살림과 육아야 말로 신의 영역이다. 바깥일 힘들다는 소리, 다 개소리다. 힘들다 징징대는 남자들더러 집에서 한달만 애 보고 살림해보라고 그래라. “바깥일이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소리 싹 들어갈테니까. 더구나 집안일은 8시간 근무제도 아니다. 일요일도 없다. 남편 혹은 남자라는 이름의 게으름뱅이들이 나 몰라라 하는 한.

어제였다. 에라, 모르겠다. TV 좀 본다고 큰 일 나냐? ‘TV 안 보기 운동’을 스리슬쩍 내동댕이치고, 애랑 알콩달콩 TV를 볼 때였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물었다. “엄마! 엄마, 여자야?” 아이가 방금 본 씨에프 때문이었다. 근사한 가전제품 앞에 선 근사한 여자가 말했다. “여자라면 꿈꾸세요.”

난 웃음을 꾹 참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응. 엄마도 여자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엄마도 꿈 꿔!” 너털웃음이 나왔다. 웃고 나니 씁쓸했다. 무슨 꿈? “네 엄마라는 여자는, 다른 꿈을 꾸는데? 근사한 냉장고가 아니라, 근사한 나 자신을 꿈 꾸는데? 너도 사랑하지만, 일도 사랑하는데? 여자라면 그러면 안 되는 거니?”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다섯 살짜리한테 해주기엔 용량 초과 수준이었다. 그 대신 난 조용히 말했다. “응. 고마워. 꿈 많이 꿀 게.” 그리고 속으로 덧붙였다. 미래는 꿈꾸는 자의 것이라며? 네 엄마가 바로 꿈순이다.

조은미 coolhotc@hotmail.com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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