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공주’ 한 씻고 희망을 말합니다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악을 쓰고 싸움을 하고 내 몸에 석유를 끼얹고, 그렇게 살았던 건 아마도 나와 세상에 대한 원망의 분출구를 찾으려는 몸짓이었던 것 같아요. 이제 그런 삶을 지나온 내게 남은 건 아흔여섯 살 나의 어머니, 그리고 옛 한을 승화하고픈 ‘희망 나눔’일 테지요.”
25년 동안 ‘기지촌 양공주’로 살았고 지금은 기지촌 운동가로 사는 그의 삶을 담은 책 <아메리카 타운 왕언니 죽기 5분전까지 악을 쓰다>(삼인 펴냄)를 낸 김연자(62)씨는 27일 “10년 동안 글을 쓰며 옛 아픔이 되살아나기도 했지만 지금은 애틋한 추억도 한도 없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고향 섬 떠나 스물에 동두천으로
욕하고 악쓰고 싸우는 나날 보내다
기지촌 여성 위한 활동에 눈뜨고
그들의 삶 세상에 처음 알렸다
이젠 희망 나누는 공동체 일군다 그가 풀어낸 이야기는 기지촌 양공주로 살아온 밑바닥 인생이 온몸으로 마주한 거칠고 험난한 삶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럴듯한 우리 현대사의 성장 뒤편에 가려진 또 다른 우리의 모습이다. 동맹국 미국의 군인들에 얽힌 숨은 이야기는 김씨의 글 속에 고스란히 ‘증언’으로 살아난다. 미군에 의한 살해된 기지촌 동료의 억울한 죽음, 팀스피리트 훈련지의 원정매춘을 준비하던 한국 관리, ‘빽 좋은’ 당시 현역 국회의원의 여동생이 운영하던 기지촌 클럽,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나온 가난한 여성이 찾았던 버스안내양·식모·호스티스 등 직업들.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게 태어난 동료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다 떠나보내야 했던 슬픔. 그 속에 핀 밑바닥 인생은 “점점 더 센 욕설을 찾아 퍼부으며 악다구니로 살던” 삶이었다. “우리 세계에서 가장 심한 욕으론 ‘번개 씹하는 꼴을 보여줘야 정신 차리겠느냐’였죠. 이보다 덜하지만 온갖 욕설이 있었죠.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그 욕설이 바로 우리만의 철학이었어요. 요즘 그런 생각 많이 해요, 우리에게도 철학이 있었다고….” 그의 말투는 허튼 게 아니었다. 그에겐 늘 세 가지 삶의 본향이 있다. 그 마음의 터는 그가 힘들 때마다 그를 살아있게 만든 힘이었다고 한다. “언제나 나를 품어주셨던 나의 어머니, 그런데 이젠 저의 보살핌이 없으면 움직일 수도 없어요. 그리고 내 고향 거문도에서 어릴 적에 보았던 수평선과 등대, 그리고 바닷가. 또 한 가지는 마음의 안식을 안겨준 기독교 신앙이었죠.”
그는 1963년 스무 살에 동두천의 미군 기지촌에 들어가 60·70년대를 송탄·군산의 아메리카 타운에서 보내고, 그 곳에서 기지촌 여성자치회의 부회장·회장을 맡으면서 기지촌 여성을 위한 활동에 눈을 뜨게 됐다. 성병 검진 과정의 폭력성에 항의하며 기지촌 여성의 권익을 위해 앞장섰고, 77년 군산에서 미군에 의한 동료 2명이 살해당하자 미군들과 직접 맞서 싸우기도 했다. 그는 기지촌 여성의 삶을 세상에 당당하게 처음 알린 사람이다. 90년대 해외 주둔 미군의 문제를 다룬 미국 웨슬리대학 캐서린 문 교수(정치학과장)의 박사학위 논문에 증언으로 도움을 주었고, <아리랑캠프>라는 미국 다큐멘터리 방송 제작에도 참여했다. 이후 미국과 일본의 여러 대학을 돌며 미군들의 성 착취를 증언하는 강연활동을 하기도 했다. “미국인들은 하나님 ‘G·O·D’를 믿고 대통령도 성경에 손을 얹고 취임선서를 하죠. 나는 미국 대학에서 우리 기지촌 여성들이 경험한 미군은 G·O·D가 아니라 그 거꾸로 ‘D·O·G’(개)라고 말해줬죠.” 그는 “심한 욕설들은 사라졌지만 이젠 이런 식으로 내 한을 전한다”고 말하며 웃었다. 그는 요즘 ‘희망 나눔’의 소박한 꿈을 키우고 있다. “내가 사는 송탄(평택)에 ‘희망 나눔 센터’를 만들어 혼자 사는 기지촌 여성 7명, 혼혈아동 3명과 함께 재활 공동체를 꾸리고 있습니다. 노모와 함께, 이들과 함께 소박한 삶의 공동체를 일구고 싶어요.” 글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욕하고 악쓰고 싸우는 나날 보내다
기지촌 여성 위한 활동에 눈뜨고
그들의 삶 세상에 처음 알렸다
이젠 희망 나누는 공동체 일군다 그가 풀어낸 이야기는 기지촌 양공주로 살아온 밑바닥 인생이 온몸으로 마주한 거칠고 험난한 삶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럴듯한 우리 현대사의 성장 뒤편에 가려진 또 다른 우리의 모습이다. 동맹국 미국의 군인들에 얽힌 숨은 이야기는 김씨의 글 속에 고스란히 ‘증언’으로 살아난다. 미군에 의한 살해된 기지촌 동료의 억울한 죽음, 팀스피리트 훈련지의 원정매춘을 준비하던 한국 관리, ‘빽 좋은’ 당시 현역 국회의원의 여동생이 운영하던 기지촌 클럽,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나온 가난한 여성이 찾았던 버스안내양·식모·호스티스 등 직업들.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게 태어난 동료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다 떠나보내야 했던 슬픔. 그 속에 핀 밑바닥 인생은 “점점 더 센 욕설을 찾아 퍼부으며 악다구니로 살던” 삶이었다. “우리 세계에서 가장 심한 욕으론 ‘번개 씹하는 꼴을 보여줘야 정신 차리겠느냐’였죠. 이보다 덜하지만 온갖 욕설이 있었죠.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그 욕설이 바로 우리만의 철학이었어요. 요즘 그런 생각 많이 해요, 우리에게도 철학이 있었다고….” 그의 말투는 허튼 게 아니었다. 그에겐 늘 세 가지 삶의 본향이 있다. 그 마음의 터는 그가 힘들 때마다 그를 살아있게 만든 힘이었다고 한다. “언제나 나를 품어주셨던 나의 어머니, 그런데 이젠 저의 보살핌이 없으면 움직일 수도 없어요. 그리고 내 고향 거문도에서 어릴 적에 보았던 수평선과 등대, 그리고 바닷가. 또 한 가지는 마음의 안식을 안겨준 기독교 신앙이었죠.”
그는 1963년 스무 살에 동두천의 미군 기지촌에 들어가 60·70년대를 송탄·군산의 아메리카 타운에서 보내고, 그 곳에서 기지촌 여성자치회의 부회장·회장을 맡으면서 기지촌 여성을 위한 활동에 눈을 뜨게 됐다. 성병 검진 과정의 폭력성에 항의하며 기지촌 여성의 권익을 위해 앞장섰고, 77년 군산에서 미군에 의한 동료 2명이 살해당하자 미군들과 직접 맞서 싸우기도 했다. 그는 기지촌 여성의 삶을 세상에 당당하게 처음 알린 사람이다. 90년대 해외 주둔 미군의 문제를 다룬 미국 웨슬리대학 캐서린 문 교수(정치학과장)의 박사학위 논문에 증언으로 도움을 주었고, <아리랑캠프>라는 미국 다큐멘터리 방송 제작에도 참여했다. 이후 미국과 일본의 여러 대학을 돌며 미군들의 성 착취를 증언하는 강연활동을 하기도 했다. “미국인들은 하나님 ‘G·O·D’를 믿고 대통령도 성경에 손을 얹고 취임선서를 하죠. 나는 미국 대학에서 우리 기지촌 여성들이 경험한 미군은 G·O·D가 아니라 그 거꾸로 ‘D·O·G’(개)라고 말해줬죠.” 그는 “심한 욕설들은 사라졌지만 이젠 이런 식으로 내 한을 전한다”고 말하며 웃었다. 그는 요즘 ‘희망 나눔’의 소박한 꿈을 키우고 있다. “내가 사는 송탄(평택)에 ‘희망 나눔 센터’를 만들어 혼자 사는 기지촌 여성 7명, 혼혈아동 3명과 함께 재활 공동체를 꾸리고 있습니다. 노모와 함께, 이들과 함께 소박한 삶의 공동체를 일구고 싶어요.” 글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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