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나온 지 10년도 더 된 벤 스틸러 감독의 <청춘스케치>를 봤다. 대학을 갓 졸업한 사회 초년생들이 겪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묘사하고 있는 이 영화를 보면서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동기들이 슬슬 대학을 졸업해 누구는 지역 방송사에서 아침 뉴스 앵커로 활동하고, 누구는 어학연수를 가는 요즘, 나는 여전히 <청춘스케치> 속 그들처럼 현실과 이상 사이를 애써 저울질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젊은 영혼’들은 대기업 취직에 목숨을 걸거나 고시 공부에 매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의 방식’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학부를 졸업하고 나서 무엇을 할 거냐는 질문을 많이 듣게 된다. 그때마다 그 ‘무엇’에 합당하는 답을 할 수 없어 주저하게 된다. 그럴 땐 내가 커닝 페이퍼처럼 숨겨놓은 대답을 슬쩍 꺼낸다. 대학원에 진학해서 교수 할 거예요. 그러면 반응은 대개 한결같다. 여자로선 좋은 직업이겠네요. 게다가 소위 ‘남성적인’ 분야인 건축이 내 전공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대답은 ‘무엇’에 관한 대답이 아니라 ‘어떻게’에 관한 대답이다. 나는 운동가가 되고 싶고 한편 아티스트로 살고 싶다. 끊임없이 세계를 변혁할 의지가 있고 더 나은 세계에 대한 희망이 있는 운동가, 그리고 매순간 자신의 오감에 충실하고 행복을 꿈꾸지 않으며 삶의 긍정성 이상으로 부정성을 감내할 자세가 되어 있는 아티스트로서의 삶을 살고 싶다. ‘여자에게 있어 가장 좋은(이 말은 ‘결혼하기에 좋은’이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직업은 교사’라는 유언비어들. 이는 모성 혹은 섬세함과 보살핌으로 대표되는 ‘여성성’이라는 것이 교사라는 직업적 특성과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기대에 기인한 것이다. 또한 역설적으로 학교가 노동 인구로서의 여성이 출산휴가, 평생직장 등 그나마 안정된 노동 환경을 보장받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임을 뜻하기도 한다. ‘여자는 고시를 봐야 한다’는 말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출발한다. 이처럼 아직도 우리나라에 그리고 세계적으로 여성으로서 다양한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없게 만드는 여러 요소들이 산재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 ‘시민’으로서의 획일적인 삶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노력 또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먼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대하는 ‘정상적인’ 4인 가족의 각본에서 벗어나고, 그리하여 결혼·육아·주택마련 등의 ‘시민적 삶’의 문제에서 자유로워진다면, 여성은(남성 역시) 좀 더 자신의 삶을 내밀하게 들여다보게 되지 않을까. 시민으로서의 삶을 충족시키는 이러한 물질적 조건들을 과감히 거부할 필요가 있다. 그 천편일률적인 조건들을 획득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삶을 너무나도 갉아먹고 있기에. 더 나은 세계가 가능한 것처럼, 더 다양한 삶의 방식 또한 가능할 테니까. 엄김수진/대학생 -kik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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