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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슬럿워크가 잡년과 여러분께

등록 2011-08-13 14:02수정 2011-08-13 14:07

어느 여름, 초등학교 6학년이던 여자아이는 성폭력을 경험했습니다. 점심을 먹고 동네 친구 집에 놀러 갔다 허탕을 치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렇게 평화롭고 평범했던 그날 오후,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던 아픈 일이 여자아이에게 닥쳤습니다.

여자아이 옷차림이 너무 야했을까

그날 있었던 일을 말하면 어른들에게 혼날까봐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여자아이는 혼자서 오랫동안 목욕을 하고, 혼자서 악몽으로 숨 막히는 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상처를,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치유해야 했습니다. 여자아이는 가끔 ‘민소매 셔츠를 입어서였을까?’, ‘분홍색 칠부바지가 너무 짧아서였을까?’ 같은 생각을 하며 자신을 탓했습니다. 성폭력은 여자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는 말을 누구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 참여한 성교육에서는 ‘성교하면 여자는 더러워진다’는 강사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생리대업체의 후원으로 마련된 성교육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여자아이는 ‘난 이미 더러워진 몸인데 어떡하나…. 더러운 나에게는 남자친구도, 결혼도, 첫날밤도 없을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강간은 성교가 아니라 폭력이라 말해주는 이도 없었습니다. 여자아이가 살아가야 하는 세상은 부적절한 옷차림 탓에 불결하게 된 몸으로는 생존하기에 너무 고달픈, 불친절하기 그지없는 세상이었습니다.

가해자가 왜 그랬을까는 이 장면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10년을 조금 넘게 산 여자아이가 부당하게 아픈 상처를 입었는데, 그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 ‘나쁜’ 상황의 원인이 자신에게, 그것도 자신의 옷차림에 있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마 그 여자아이는 어른들의 대화에서, 선생님들의 얘기에서, 텔레비전이나 잡지에 등장하는 장면에서 성폭력과 옷차림의 상관관계에 대해 들었을 테지요. 자책하느라 분홍 미래를 꿈꿀 수 없던 그 여자아이는 “야한 옷차림이 성폭력을 유발한다”는 담론을 받아들이고 내면화하도록 한, 그리고 가해자에게 관대한 사회의 희생자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내가 분노한 이유

북미의 어느 대학, 남성 경찰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강의를 하며, “성폭력을 예방하려면 슬럿(Slut)처럼 입지 말아야 한다”고 했답니다.(1)

내가 그 강의를 들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성폭력을 예방하려면 슬럿처럼 입지 말아야 한다”는 강연자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내 옷차림은 어떤가’, ‘슬럿인가 아닌가’, ‘성폭력으로부터 안전한가 아닌가’를 생각하며 내 옷을 검열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집에 돌아가 뒤늦게 ‘아니 슬럿 같은 옷차림이라는 게 뭐야? 신체의 몇%가 드러나야 슬럿 옷차림인데? 옷이 문제라면 폭력의 원인이 그 옷을 골라 입은 피해자에게 있다는 건가? 만약 내가 슬럿처럼 입고 강간당했다면 당해도 싼 년이 된다는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점점 화가 났을 것입니다. 나 같은 수많은 여성이 화가 났을 것이고, 그래서 성폭력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하는 ‘가해자에게 면죄부 주는 더러운 세상’에 목소리를 들려주고자 거리로 나와 분노의 행진을 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야한 옷을 입고 싶은 여성의 욕망’은 여성들이 주장하려던 중요한 어젠다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거리로 나온 여성들 중에는 ‘야한 옷’을 입고 싶은 사람들도 있을 테지만, ‘내가 무슨 옷을 입어도 나를 강간할 텐데 내가 옷차림까지 신경 써야 해? 내가 아침마다 강간범의 취향을 고려해서 옷을 골라야 하는 거야? 이 옷은 경기도 화성 부녀자 연쇄살인 사건의 가해자가 좋아하는 빨간색이니 안 되고, 이 옷은 로리타 콤플렉스가 있는 변태들을 자극할 수 있는 분홍색이니 안 되고 하면서, 있을지도 모르는 강간에 대비해야 하는 거냐고!’ 하며 옷 골라 입기와 같은 평범한 일상의 의례에서조차 ‘가해자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고려할 것’ 따위의 강령을 늘 지키며 실천해야 한다는 예비 피해자로서의 자신의 위치가 한심하고 짜증나고 어이없는 여성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강령을 기억하고 철저하게 지키는 부녀자여야만 그나마 강간의 피해를 경험해도 “존중받아 마땅한 피해자”로 겨우겨우 불릴 수 있다는 사실에 역시 분노했을 것입니다.

 

어떤 옷 입어도 폭행당하지 않아야

‘내 마음대로 옷 입을 권리’에 대해 생각합니다. 이 글에서 이 문장은 슬럿워크에 대한 사람들의 대표적인 해석, ‘야한 옷을 마음대로 입을 권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랍니다. 물론 슬럿워크는 야한 옷을 마음대로 입고도 안전한 사회, 세상을 요구하는 행진이 맞습니다.

이런 질문을 해보고 싶습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내 맘대로 옷 입을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요? 아마 별로 없을 것입니다. 남성이나 여성, 아이, 어른, 노인 등 각자가 속한 문화 안에서 구성원으로 승인받는 방식의 옷차림을 할 것입니다. 옷장에서 오늘 입을 옷을 고를 때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 한국 사회에서 마음대로, 자율 의지로 옷 입는 사람은 극히 소수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다 북미 경찰이 말했던 ‘강간을 피하려면 슬럿처럼 입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까지 붙으면 아침마다 옷 고를 때, 혹은 옷을 사려고 할 때 여성들은 더 많은 고민을 해야겠지요.

동성애자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 게이 친구가 어느 날 빨래하다 붉은 물이 든 흰 양말을 신고 출근했고, 그 양말을 본 직장 상사가 “너 게이냐? 분홍색 양말을 신게, 하하하”라며 농담을 던졌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그는 흠칫 놀라 식은땀을 흘렸다는 것입니다. 그때 자신의 정체성이 밝혀지면 어쩌나, 그 일로 해고당하면 어쩌나, 별별 생각을 다 했을 테지요. 고작 붉게 물든 흰 양말에 그런 반응을 보였으니, 분홍 바지였으면 어땠을까요. 커밍아웃하지 않은 동성애자들은 옷차림을 통해 자신의 소수자성이 드러나게 될까, 그로 인해 부당한 차별을 경험하게 될까, 폭력과 혐오를 경험하게 될까, 심하게는 동성성폭력이나 교정강간(Corrective Rape)(2)을 경험하게 될까 조심스러워하면서 옷을 고릅니다. 그야말로 옷차림이 표적이 되는 것이지요. 옷차림은 소수자 집단에게는 자긍심을 드러내는 징표가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소수자들을 혐오하거나 그들에게 해를 가하려는 집단에게 폭행이 가능한 대상임을 알려주는 표지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이유로 개인의 선호와 선택권에 대해 ‘안전한 옷차림’이라는 논리를 강제하는 사회가 과연 바람직할까요? 그것도 특정한 소수자 집단에게 말입니다. 누군가가 어떤 옷을 선택해도 안전한 사회, 안전한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슬럿워크 메시지 중 하나입니다.

“성폭력을 예방하려면 슬럿처럼 입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여러 가지 다른 상황에 대입해보겠습니다. ‘여성의 머리카락은 남성의 성적 욕망을 자극하므로 범죄예방을 위해 가려야 한다’, ‘동성애자처럼 보이는 복장은 혐오범죄를 유발할 수 있으니 평범한 이성애자처럼 보이는 옷차림을 해야 한다’, ‘노인 혐오범죄 방지를 위해 노인들은 외출을 삼가고 대중교통 이용을 자제해야 한다’, ‘교내 폭력을 방지하기 위해 약한 학생들은 얌전한 말투와 공부에 몰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피해야 한다’, ‘스토킹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매력적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 ‘여자아이들은 소아성애자의 표적이 될 수 있으니 학교에 보내지 말아야 한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 문장들을 좀 진지하게 들여다보면 그렇게 낯설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많이 들었기 때문에 설득력 있는 말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조심해야 합니다. 이 모든 문구의 공통점은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가 당연한 사회라면 일련의 범죄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것이고, 당연히 처벌도 가벼워질 것입니다. 모든 범죄의 책임은 피해자에게 있으니 피해자만 조심하면 된다는 생각이 팽배해지겠지요. 또 이런 말들과 논리의 심각한 부작용은 피해를 경험한 이들에게 그 범죄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그 자책은 악몽 같은 기억으로 인한 장애, 곧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것을 어렵게 만듭니다.

 

범죄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중요한 것은 이런 사건들을 개인 간의 문제로만 보는 시선이 이 범죄와 범죄자를 탄생시킨 사회와 공동체에 결여된 것, 보완해야 할 것들을 보지 못하게 하고 쉽게 삭제해버리는 것입니다. 범죄의 책임은 그 범죄가 일어난 공동체 전체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슬럿워크의 구호와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들은 누구일까요? 비단 잠재적 가해자들뿐 아니라, 공동체의 구성원 전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잡년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여성과 남성, 아이, 노인, 그리고 법과 제도를 만들고 집행하는 모든 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간의 책임을 여성에게 묻는 사회가 아니었다면 서두에 등장하는 여자아이가 느꼈을 고통은 훨씬 줄어들었을 것입니다. 아마 아이는 어른들에게 자신의 신체에 가한 폭력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을 것이고, 자신에게 돌아올 비난을 걱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움을 청할 수 있었을 것이며, 그 상처의 기억에서 벗어나는 것도 훨씬 수월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폭력을 쉽게 피해자의 책임으로 돌리고 가해자에게 관대한 사회가 아니라면 수많은 여성이 밤길을 걸으며, 대낮에 후미진 골목을 걸으며, 한적하거나 복잡한 대중교통에 탑승하며 가져야 하는 성폭력에 대한 스트레스와 공포에서 좀더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여성이 좀더 자유로운 친절한 세상

비 내리는 어스름한 오후부터 깜깜한 밤까지 거리에서 벌어진 잡년들의 놀이판에는 옷차림을 검사하는 자신의 내면화된 검열도, 자신의 옷차림을 평가하고 비난하는 타인의 시선도, 언제 어느 곳에서 경험할지 모르는 성폭력의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비를 맞으며 두려움 없이 웃통을 벗어젖히고 질펀하게 놀았습니다. 비록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 골목길이 다시 두려워질지라도 참여한 여성들은 즐겁고 안전했습니다.

이날 하루, 행진과 놀이에서 잡년들의 해방구가 여성들의 두려움 없는 안전한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어떻게 지속적인 반성폭력운동이 될지는 이를 지지하는 페미니스트 활동가, 연구자들의 몫일 것입니다.

글·지현

문화연구자. 2002년 1집 앨범 <逅 [hu:] 만나다> 발표. 한국성폭력상담소 성문화운동팀 자문위원.

<각주>

(1) ‘슬럿워크’(Slutwalk·잡년행진)는 지난 1월 24일 캐나다 토론토의 대학 캠퍼스 안전교육에서 경찰관이 언급한 “피해자가 되지 않으려면 슬럿처럼 입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한마디가 촉발한 행진이다. 한국에서는 지난 7월 16일 서울 광화문 원표공원에서 열렸다. 준비 기간 내내 온라인상에서는 잡년행진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지지, 오해가 등장했다.

(2) 동성애자에게 그들의 성정체성을 교정(‘치료’라고 부르기도 한다)하기 위한 목적으로 가해지는 성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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