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21일 내린 이른바 `딸들의 반란' 판결은 종중 내 출가 여성의 지위 뿐 아니라 관습의 변화에 따른 종중의 현대적 의미와 재산분배 문제는 물론, 대법원의 기능과 역할 등에 대해 다양한 시사점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법원이 "사회 환경과 국민의식의 변화로 기존 관습에 대한 국민의 법적 확신이 약화됐다"며 기존 판례를 뒤집은 것은 진보적 판결이라는 평가가 나오지만 민법이 바뀌고 호주제가 위헌결정을 받은 뒤에 나와 때 늦은 감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 대법원 판결의 취지 = 대법원 판결은 부계 혈통 중심의 기존 종중 문화는 우리사회의 환경과 국민의식의 변화로 더 이상 존립하기 어려우며 남녀평등 원칙의 문화가 사회관습으로 새롭게 자리잡았음을 확인한 것으로 해석된다.
우리나라 성문법은 종중의 개념을 명확히 규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법원은 `실정법'이 아닌 `관습법'의 영역에서 사회관습을 감안해 판례를 통해서 종중의 의미와 범위를 규정해왔다.
기존 대법원 판례가 규정한 `종중'이란 공동선조의 분묘 수호와 제사 및 종원 상호간 친목을 위해 공동선조의 후손 중 성년 남자를 종원으로 구성되는 종족의 자연적 집단이라는 것.
같은 공동선조의 후손이라도 성년 여성은 종원이 될 수 없다는 게 기존 판례의 입장이었고 이번 원고들은 기존 대법원 판례에 충실한 하급심에서 연패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날 "1970년대 이후 우리사회 환경과 국민의식의 변화로 사회 구성원들의 법적확신이 약화됐다"며 관습의 변화를 선언했고 "개인 존엄과 양성평등 원칙에 따라 가족 내에서 남녀가 차별받지 않는다"는 법적 원칙도 천명했다.
변화의 흐름에 따라 관습이 변한 이상 종중의 존재 목적과 본질도 과거와 다르게 해석될 수 밖에 없고 성년 여자를 배제해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는 게 최고 법원의 해석인 것이다.
별도 의견을 낸 6명의 대법관들도 "성년 남자와 달리 성년 여자들은 종중가입을 원하는 경우에 한해 종중 구성원이 된다"면서도 원칙적으로 기존의 성년 남자 중심의 종중 문화는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다는 데는 동의했다.
◇ 대법원 판결 배경 = 이번 대법원 판결은 단순히 `여성의 지위가 과거보다 상승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 외에도 변화하는 현대사회의 흐름이 과거의 관습적 제도에 수용되고 융화되는 과정에 대한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관습은 필연적으로 변하는 것이며 법원의 판례를 통해 강고하게 확립된 관습적 공동체의 규정이라도 이 같은 흐름을 거스르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국회의 민법 개정과 헌재의 호주제 위헌 결정, 그리고 대법원의 이번 판결이 함께 보여준 셈이다.
특히 종중원 지위확인 소송이 종중 재산 분배 문제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은 여성들이 추상적 이념으로서의 지위향상을 요구하는 것을 넘어 가장 실제적 권리인 재산권을 적극 요구해 쟁취할 가능성을 열어준 것으로 풀이된다.
`공동선조의 분묘 수호와 제사 및 종원 상호간 친목도모'라는 종중의 목적은 외관상 `의무'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권리'가 놓여있었고 이는 국토개발에 따른 부동산 가치의 상승으로 인해 재산권의 형태로 구체화한 것이다.
피고측이 "여성들에게 종중 재산권을 인정하면 종중재산 보호와 유지는 어렵고 여성들에게 제사 의무 등을 요구하기는 어려워져 결국 종중의 존립이 위협받게 될 것이다"고 우려하는 것도 종중내 남성 중심의 재산권 문화를 방증한다.
◇ 개혁적이지만 보수적인 판결 = 대법원은 종중 제도의 근간을 뒤바꾸는 혁신적인 판결을 하면서도 기존의 법률관계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안전장치를 마련해뒀다.
대법원 판례변경의 효력은 앞으로 새로이 성립되는 법률관계에만 적용된다고 제한함으로써 과거에 성년 남자 위주로 분배된 재산관계에는 손댈 수 없게 만든 것이다.
과거 종중들이 남자들끼리 재산을 분배하고 종중 총회를 열어 왔더라도 그것이 기존의 대법원 판례를 믿고 한 결정이라면 법적 안정성과 신의성실 원칙에 따라 그 법적 효력을 문제삼을 수 없다는 취지다.
그 때문에 이날 승소 취지 판결을 받은 원고들도 종원지위는 확인받지만 과거에 이뤄진 재산분배를 다시 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고 앞으로 재산분배가 있을 경우에만 지분을 요구할 수 있다.
◇ 대법원의 정책법원 역할 = 대법원은 이번 판결 심리를 위해 사상 최초로 공개변론을 실시하는 등 정책법원으로서 역할을 다방면으로 모색해왔다.
2년여간 이번 사건을 심리한 대법원은 `변화의 흐름을 수용하자'는 논리와 `법률관계의 혼란을 막고 법적 안정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논리를 두고 대법관들과 재판연구관 사이에서 적지 않은 이견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재경 법원의 부장판사가 이번 판결을 연구하면서 일반 국민과 전문가 집단을 상대로 의식조사를 실시했다는 사실은 이 같은 고민의 일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대법원이 `법적 문제 판단은 판사들만의 권한'이라는 강박을 벗고 국민의 소리에 적극 귀를 기울인 결과 기존 판례를 바꿔야 한다는 다수의 의견(일반인 69.7%, 변호사ㆍ교수 등 전문가 64%)이 `정책법원'에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번 판결이 이미 국회의 민법 개정과 헌재의 호주제 위헌결정 이후에 뒤늦게 나왔다는 점에서 사법부가 사회적 이슈를 자신있게 먼저 치고 나가지 못하고 `눈치보기'와 `뒷북치기'를 했다는 시각도 없지 않다.
한편에서는 수장 교체를 앞둔 법원이 최근 시민단체와 언론 등으로부터 보수성에 대한 비판과 개혁 요구를 받게 되자 보수성에 대한 방어 차원에서 이번 판결을 제시한 것 아니냐는 의심도 있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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