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판결 옛 평등정신 되찾는 것”
기계 유씨 대종회장 지내며
여성지위 향상에 힘쏟아
“나혜석은 페미니즘의 씨앗
항일애국자요 선각자
그의 당당함에 반했다” “딸들도 똑같은 우리 자식입니다. 여성을 종중원으로 인정하는 일은 시대 흐름에 따른 일일 뿐만 아니라 원래의 것을 찾아가는 일입니다. 성리학이 자리 잡기 전인 조선 중기까지 우리나라 조상들은 재산을 상속할 때 남녀 차별을 두지 않았어요. 친정아버지 묘 밑에 출가한 딸이 자신과 남편의 묘 자리를 쓰기도 했어요.” 지난 19일, 여성을 종중원으로 인정한 대법원의 판결을 누구보다 기뻐하는 ‘남자’가 있다. 유동준 회장(68) 한국단미사료협회 회장. 전국 15만 명에 이르는 기계 유씨 집안의 대종회 명예회장이다. 유씨는 여성들에게 문을 열기를 꺼리는 다수 대종회 사람들과 다르게 “이번 판결로 여성이 종중의 다양한 혜택을 이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에게 이번 판결은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듯했다. 지난 2002년, 그는 기계 유씨 대종회장직을 맡으면서 종회 내 여성의 지위향상에 힘을 쏟았다. 종회 안에 여성분과위원회를 만들어 여성 참여를 독려하고, 해마다 250명씩 남자 대학생에게만 주던 장학금을 여자들에게도 줬다. 반발도 많았다. 48년 대종회 설립 때부터 남성에게만 주던 장학금을, 어차피 결혼하면 ‘다른 집안 사람’이 될 여성들에게 왜 주느냐는 비판이었다. 그는 “대종회가 시대에 맞게 젊은이들과 여성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필요가 있다”고 집안사람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반대 목소리가 높자 처음에는 여성 장학생 비율을 10% 정도로 낮게 잡았다. 그러다가 매년 조금씩 비율을 높여 올해부턴 남녀 각각 50%씩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여성에게 장학금을 주는 게 쉽지 않더군요. 하지만 같은 능력을 가진 후손들을 성에 따라 차별하는 것은 양성평등 사회를 추구하는 오늘날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여성의 권리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서양화가인 정월 나혜석 덕분이다. 지난 95년부터 나혜석 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그는 나혜석을 “우리나라 페미니즘의 씨앗”이라고 본다. 그가 나혜석을 처음 만난 때는 15살 무렵. 옛날 잡지에 실린 나혜석에 대한 기사를 보면서 그가 뛰어난 여성화가 이면서 동시에 시대를 앞서 살아간 선각자였음을 알게 됐다. “수원 출신인 나혜석은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어요. 제 고향도 수원이거든요. 저 역시 어린 시절부터 가부장제 교육을 받고 자라서 ‘출가외인’ 의식이 강했지만 나혜석을 알게 된 뒤로는 달라졌습니다. 여성들도 자신의 뿌리에 대해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걸 알았죠.” 그는 전국 각지에 흩어진 나혜석의 그림과 발자취를 모으는 일부터 시작해 심포지엄, 평전 발간, 문화거리 조성, 연극 등의 기념사업도 도맡아 했다. 지난달 서울에서 열린 세계여성학대회 때 나혜석 학술 심포지엄을 열어 나혜석을 외국인들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이 모두가 ‘이혼녀’, ‘방탕한 신여성’ 등으로 왜곡되고 흥밋거리로 전락해 잊혀져간 나혜석을 다시 불러내는 일이었다.
“나혜석의 당당함에 반했어요. 이혼할 때는 재산 분할권과 자녀 면접권을 요구했다고 해요. 지금도 어려운 일인데 그때는 어땠겠어요? 그는 3·1운동에 가담해 5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한 애국의 여인이고, 저명인사들이 변절할 때 친일 행각을 거부한 채 구시대적 권위와 도덕률에 저항했던 인물입니다. 자유분방한 신여성이 아니라 선각자라고 봐야죠.”
여성지위 향상에 힘쏟아
“나혜석은 페미니즘의 씨앗
항일애국자요 선각자
그의 당당함에 반했다” “딸들도 똑같은 우리 자식입니다. 여성을 종중원으로 인정하는 일은 시대 흐름에 따른 일일 뿐만 아니라 원래의 것을 찾아가는 일입니다. 성리학이 자리 잡기 전인 조선 중기까지 우리나라 조상들은 재산을 상속할 때 남녀 차별을 두지 않았어요. 친정아버지 묘 밑에 출가한 딸이 자신과 남편의 묘 자리를 쓰기도 했어요.” 지난 19일, 여성을 종중원으로 인정한 대법원의 판결을 누구보다 기뻐하는 ‘남자’가 있다. 유동준 회장(68) 한국단미사료협회 회장. 전국 15만 명에 이르는 기계 유씨 집안의 대종회 명예회장이다. 유씨는 여성들에게 문을 열기를 꺼리는 다수 대종회 사람들과 다르게 “이번 판결로 여성이 종중의 다양한 혜택을 이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에게 이번 판결은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듯했다. 지난 2002년, 그는 기계 유씨 대종회장직을 맡으면서 종회 내 여성의 지위향상에 힘을 쏟았다. 종회 안에 여성분과위원회를 만들어 여성 참여를 독려하고, 해마다 250명씩 남자 대학생에게만 주던 장학금을 여자들에게도 줬다. 반발도 많았다. 48년 대종회 설립 때부터 남성에게만 주던 장학금을, 어차피 결혼하면 ‘다른 집안 사람’이 될 여성들에게 왜 주느냐는 비판이었다. 그는 “대종회가 시대에 맞게 젊은이들과 여성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필요가 있다”고 집안사람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반대 목소리가 높자 처음에는 여성 장학생 비율을 10% 정도로 낮게 잡았다. 그러다가 매년 조금씩 비율을 높여 올해부턴 남녀 각각 50%씩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여성에게 장학금을 주는 게 쉽지 않더군요. 하지만 같은 능력을 가진 후손들을 성에 따라 차별하는 것은 양성평등 사회를 추구하는 오늘날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여성의 권리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서양화가인 정월 나혜석 덕분이다. 지난 95년부터 나혜석 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그는 나혜석을 “우리나라 페미니즘의 씨앗”이라고 본다. 그가 나혜석을 처음 만난 때는 15살 무렵. 옛날 잡지에 실린 나혜석에 대한 기사를 보면서 그가 뛰어난 여성화가 이면서 동시에 시대를 앞서 살아간 선각자였음을 알게 됐다. “수원 출신인 나혜석은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어요. 제 고향도 수원이거든요. 저 역시 어린 시절부터 가부장제 교육을 받고 자라서 ‘출가외인’ 의식이 강했지만 나혜석을 알게 된 뒤로는 달라졌습니다. 여성들도 자신의 뿌리에 대해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걸 알았죠.” 그는 전국 각지에 흩어진 나혜석의 그림과 발자취를 모으는 일부터 시작해 심포지엄, 평전 발간, 문화거리 조성, 연극 등의 기념사업도 도맡아 했다. 지난달 서울에서 열린 세계여성학대회 때 나혜석 학술 심포지엄을 열어 나혜석을 외국인들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이 모두가 ‘이혼녀’, ‘방탕한 신여성’ 등으로 왜곡되고 흥밋거리로 전락해 잊혀져간 나혜석을 다시 불러내는 일이었다.
“나혜석의 당당함에 반했어요. 이혼할 때는 재산 분할권과 자녀 면접권을 요구했다고 해요. 지금도 어려운 일인데 그때는 어땠겠어요? 그는 3·1운동에 가담해 5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한 애국의 여인이고, 저명인사들이 변절할 때 친일 행각을 거부한 채 구시대적 권위와 도덕률에 저항했던 인물입니다. 자유분방한 신여성이 아니라 선각자라고 봐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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