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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뱃속 아기가 <향수>에 나오는 그르누이가 아닐까?

등록 2012-05-07 15:31

입덧은 세계 모든 임신부들의 공통적인 현상이다. 입덧을 겪지 않은 예외적 임신부의 남편은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일지도 모른다.
입덧은 세계 모든 임신부들의 공통적인 현상이다. 입덧을 겪지 않은 예외적 임신부의 남편은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일지도 모른다.
남편이 본 아내의 임신 - (3)입덧
입덧은 세계 모든 임신부들의 공통적인 현상이다. 입덧을 겪지 않은 예외적 임신부의 남편은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일지도 모른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기지."

딸 하나를 둔 대학 동창 하나는 '입덧'을 이렇게 묘사했다. 또래들이 차례차례 아빠가 돼가는 시기다보니, 으레 입덧 시기의 고초에 대한 이야기가 한 번씩은 나온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품절남(또는 유부남)들끼리만 나누는 비밀스런 주제다. 작업질, 추파질과 줄다리기의 향연에 아직 빠져있는 미혼남들에겐 알려주지 않는 '그들만의 이야기'.

이 친구는 밤에 침대에서 잘 자격을 박탈당했다. 남편 냄새가 싫다고 했단다.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해서가 아니다. 그냥 체취가 싫었단다. 샤워하고 나오는데 냄새가 싫다며 소리를 지를 정도였다. 친구는 슬슬 피해다니면서 바닥에 이불을 펴놓고 잤다. 입덧이 임신 기간 내내 지속되는 바람에 출산 직전까지 '각방 생활'을 했다. 친구는 서러웠다 했다.

또다른 친구 하나는 식사를 베란다에서 했다. 밥 냄새, 반찬 냄새가 싫다고 했단다. 베란다 - 거실 사이의 유리창을 닫아놓고는 바깥 풍경을 보거나 집안을 들여다보면서 밥을 먹었다. 심지어 그랬음에도 친구는 "밥 냄새 싫다니까!" 소리를 들었다. 어디 그 뿐이랴. 치약 냄새가 싫다고 해서 부부가 모두 한동안 어린이용 치약을 쓴 집도 있다. 스킨 냄새가 싫다 해서 베이비로션을 쓰기 시작한 친구도 있다. 뭘로 포장해도 아름답지 않은 '사건'들이다.

우리집도 다를 바 없다. 난 그때 아내를 보면서, 뱃속 아기가 <향수>에 나오는 그르누이같은 녀석은 아닐까 걱정했다. 아내는 원래 후각이 참 둔한 사람이다. 냄새를 잘 분간하지도 못하고, 집안 어딘가에서 악취가 나도 잘 모른다. 심지어 쉰 음식도 먹어보고 알 정도였다. 그러던 사람이 "세상에 이렇게 냄새가 많은 줄 몰랐어!"라며 괴로워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낯설었다. 집안에서 냉장고 문을 못 열게 했다. 밥솥 냄새도 싫다고 했다. 세제 냄새를 참을 수 없다고 했다. 단풍든 가을철 은행 냄새가 지독하다고 했다. 쓰레기 수거 장소라도 있을 때면 곧장 반응이 왔다.

반응이라 함은, 티비에서 종종 접하는 헛구역질이 전부가 아니다. 정말 토해내는 경우가 많다. 아내는 하룻밤새 여덟번 토하러 화장실에 달려간 적도 있다. 뭐 특별히 이상한걸 먹어서가 아니다. 평소 좋아하던 비지찌개, 닭도리탕, 냉면 등을 먹었을 뿐인데, 또는 매일 하던 양치질을 했을 뿐인데, 아내는 밤을 지새며 변기를 껴안고 있었다.

입덧의 원인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산모의 몸이 임신이라는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가장 이해하기 쉬웠던 '설'은, 산모가 아기 아빠의 특질을 담은 태아를 몸속에 키우면서 그 이질적 요소들 때문에 충돌이 생긴다는 해설이었다. 결국 아빠를 많이 닮으면 입덧이 심해진다는 얘기인데, 결과를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아 딱히 정확하다고 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어떻든 임신의 단초를 제공한 아빠가 나몰라라 할 상황이 아닌 건 분명하다.

뭇 남성들로부터 돌 맞을 각오를 하고 고백하자면, 나는 한달동안 회사를 쉬면서 아내의 입덧 뒷바라지를 했다. 입덧이 심하던 8~12주 기간이었다. 사실 회사 사정으로 눈물을 머금고 휴직을 할 상황이 생겼고, 딱히 할 일이 없으니 불행중다행으로 집중케어가 가능했다.

출퇴근길 이런저런 냄새를 피하기 위해 아내의 전용 기사가 돼줬다. 음식 냄새를 못 맡으니 내가 아침, 저녁을 준비했다. 냄새 탓에 회사 식당가를 돌아다니지 못한다 해서 냄새가 심하지 않은 음식들로 만든 도시락도 쌌다. 이온음료를 얼려서 먹으면 좋다고 해서 밤마다 얼려서 아침에 보온병에 넣어줬다. 포도, 귤, 사과, 배 등 과일을 쌓아놓고는 주스도 갈고 밥 대용으로 먹기도 했다. 집안에 냄새가 나지 않도록 날마다 청소, 빨래도 열심이었다. 아내가 출근한 동안 매일 쓸고닦고 하다보니, 일주일 한 차례 주말에나 청소하던 우리 집이 그때만큼 깔끔했던 적도 없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신기하게도 입덧은 잦아들었다. 13주 넘어가면서부터는 서서히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입덧하는 동안 둘다 제대로 먹지 못해 살도 쏙 빠졌는데, 식욕이 돌아왔다. 입덧이 지나고 임신 5~6개월 무렵은 임산부들이 가장 행복해 하는 시기라고들 한다. 아내는 그렇게 '행복기'를 맞이했고, 나는 출근을 다시 시작했다.

입덧은 힘들다. 하지만 아무리 죽도록 힘들다 해도… 아내는 최근 입덧으로 고생하는 한 후배와 통화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 보고 조금은 웃었다.

"괜찮아. 없어져. 안 죽어."

** 이 글은 지난 2010년 첫 아이 출산을 며칠 앞두고 개인블로그 '소년적 호기심'(blog.hani.co.kr/oscar)에 올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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