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 때문에 경주 시댁에서 1박 2일을 지냈다. 장마가 끝난 텃밭에서, 싱싱하다 못해 바늘같은 가시를 곤두세우고 있는 오이를 툭툭 끊어 따는 손맛. 윽, 감동이다. 인공 관절 박은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서 잡초를 뽑으셨을 시어머니의 수고에 절로 옷깃이 여며졌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다. 샛노란 오이꽃, 보랏빛 가지꽃, 노란 병아리빛 쑥갓꽃이 눈에 쏙쏙 들어온다. 전엔 늘 거기 있어도 보이지 않던 작은 꽃들이다. 그 뿐인가? 보랏빛과 흰빛이 아무렇게나 어울려 핀 도라지꽃들의 서늘한 미모라니. 채소 꽃의 아름다움이 장미나 백합 같은, 비싸게 팔리는 서양 꽃들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작고 여린 오이꽃이 피어야 오이가 열리는 걸, 애잔한 가지꽃이 피어야 가지가 둥실 열린다는 걸, 얼마나 오래 잊고 있었던가? 잊고 산 게 어디 한둘이었을까마는…. 하도 기막혀 오이 밭에 구부리고 앉아 있으려니 시어머니와 가까이 사시는 또 한 분의 독신 여성인 시이모께서 툭 한 말씀 던지신다.
“우리 똑똑네 조카 며느리, 이건 모르지? 오이고 호박이고 토마토고 밤 9시에서 11시 사이에 쑤욱 커버리는 거 말이야. 모든 식물들이 그렇거든.”
허걱! 아니 시계 들고 텃밭에서 망이라도 보셨나? 우째 그리도 잘 아시는가요? 서울에서 오래 사신 분인데 지난 1년간 텃밭 농사의 달인이 되신 모양이었다. 시이모님이 또 한말씀하셨다.
“아침마다 눈이 번쩍 떠진다니까. 밤새 오이며 가지가 얼마나 컸는지 오래 누워있을 수가 없어. 세상에 어느 애인이 이만큼 보고싶을까?”
시어머니나 시이모나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보통 할머니’다. 하지만 이 두 분의 현역 여성 농민들은 동시에 ‘삶의 고수’다. 특히 시어머니는 시집간 딸들의 아이들을 맡아 기르며, 텃밭 농사 짓고 벌통까지 관리하신다. 아카시아 꿀 단지를 싸 보내시며 “경주 고을 아카시아하고 찔레꽃들 모두 담아 보낸다”고 전화기 너머로 하하 웃으시는 분이다. 고추 농사, 깨 농사에 배추 농사까지 지으셔서 해마다 200포기 김장과 간장, 된장, 고추장을 딸 다섯과 며느리에게 모두 나눠주신다. 뿐인가. 각종 제사, 선대들의 묘지 관리, 자식들 섬기기까지 인간 관계의 종합적 매뉴얼을 내장하신 고수이시기도 하다. 이 모든 프로그램을 생색없이 태연하게 해내는 초절정 멀티 플레이어 시어머니. 그 분은 말씀하신다. “엄마 노릇엔 정년 퇴직도 없고 딸에 대한 애프터서비스는 평생 해야 하니 딸 많이 낳은 여자는 산삼이라도 캐먹고 건강해야 한다”고.
오늘 아침, 경주의 아카시아, 찔레꽃들의 진한 향기 담긴 할머니표 꿀물 한 잔을 그윽하게 들이마시던 내 딸이 한마디 한다. “세상 모든 할머니들을 인간문화재로 지정해야 돼요.” 그래 그 말이 백번 옳다. 박어진/자유기고가 behappy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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