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 끝났다. 한동안 홀가분했던 어깨에 가방끈을 둘러매고 아이는 학교로 갔다. 가방 무게에 짓눌리는 건 아이만이 아니다. 엄마 마음도 덩달아 무거워진다. 학력고사, 경시대회, 급수대회 등 한 학기분 시험일정이 경마 레이스처럼 어김없이 펼쳐질 거다. 1~2점에 일희일비하며 아이를 잡아족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내면서 생각했다. 너무 공부, 공부 하지말고 자연스레 적응하도록 좀 내버려두자고. 그로부터 1년반, 다짐은 간 데 없고 아이 시험 때마다 덩달아 ‘시험’에 드는 ‘공부신경증’ 엄마가 되어있다.
둘러보니 나만의 증상도 아닌 것 같다. “수학 문제집을 푸는데 아무리 설명해줘도 애가 못 알아듣는 거야. 어느 순간 꽥꽥 소리지르면서 애 등짝을 후려 갈기고 있더라구. 갑자기 내가 왜 이럴까, 미쳐버린거나 아닐까, 무서운 생각까지 들더라.” 옆집 애 엄마 얘기다.
다들 왜 이렇게 ‘환자 엄마’가 되어버린 걸까. “공부를 잘해야 나중에 대접받고 살잖아. 뭐든지 하나는 잘난 데가 있어야 되는 세상이잖아.”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자식이 공부 잘 해 능력의 최대치까지 마음껏 펼쳐가며 행복하게 살았으면 싶은 엄마 마음에 누가 돌을 던지랴. 하지만 돌아보면 난 때때로 그런 마지막 목적의식마저 깜빡 잊곤 한다. 무작정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여 뒤처지면 안달하고, 잘하면 잘하는대로 못하면 못하는대로 목이 마르다. 아이 공부에 관한 한 부모들은 너무도 쉽게 이성을 잃고, 눈먼 말이 되곤 한다. 왜 그럴까. 갈수록 1등만 모든 걸 가져가버리는 무한경쟁 사회가 안겨준 노이로제일까.
어느 심리학 책에선가 읽은 말이 기억난다. 사람은 하나하나가 모두 특별해 비교할 수 없는 존재인데 이걸 하나의 자로 자꾸 줄세우려 드는 데서 불행이 시작된다고. 내 마음을 들여다봐도 그렇다. 아이가 사랑스러운 건 아이가 꼭 1등이라서, 잘나서가 아니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예뻤다. 애 키워본 엄마들은 모두 그런 마음 알 거다.
아버지가 브래지어 처음 한 딸의 등을 쓸어내리며 딸의 인생이 길네 어쩌네 말하는 보험회사 광고를 보았다. 해괴망칙한 선전도 다있다 했지만 “이제 곧… 결혼하고 엄마가 될 것이다”라던 카피 속 ‘엄마가 된다’는 말은 어쩐지 심금을 울렸다. 아이가 커리어우먼으로 잘나가는 인생을 살아도 좋겠지만 그저 엄마가 되는 것도 좋다. 내가 해보니까 나쁘지 않았다. 꼭 공부 잘하고, 최고가 아니었어도, 아이만으로도 삶은 무한한 기쁨으로 넘쳤다. 지금 아이에게 필요한 건 꼭 공부가 아닐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다짐해본다.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최고가 되어야만 살아남는다고 자꾸만 유혹하는 세상 논리에 맞서 아이를 지켜줄 사람은 나뿐이다. 내가 먼저 휩쓸리지 않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야겠다고 새 학기의 문턱에서 ‘전의’를 가다듬는다. 손윤정 프리랜서 작가 soksaram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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