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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2050여성살이] “집이란…” 딸에게 한수 배웠다

등록 2005-09-13 17:24수정 2005-09-14 17:28

꿈많던 소녀시절 누구나 한번쯤 읽어 봤을 빨간머리앤. 20년 넘게 잊고 살아온 그 앤을 딸이 생긴 뒤 디브이디로 다시 보고 있다. 어른이 돼 다시 만난 앤은 그대로 또 새롭다. 알알이 주스 속 과육 입자처럼 그맘 땐 몰랐던 뜻밖의 감흥들이 여기저기서 톡톡 터져오른다. 문명의 편익을 반납한 댓가로 얻어지는 자연의 풍요로움, 미우나 고우나 이웃끼리 속속들이 알고 사는 공동체적 삶, 피 한방울 안 섞인 앤을 자식으로 받아안는 머슈와 마릴라 남매, 자신을 키워준 마을에 대한 첫 마음을 절대 접지 않는 앤…. 흔히 말하는 ‘정상 가정’에 대한 편견은 이들에겐 먼나라 얘기며, 참된 지역주의란 어떤 것일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 중에서도 얼마전 본 한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 오빠인 머슈가 죽고 앤마저 대학으로 떠날 즈음 마릴라는 실명 위기에 처한다. 평생 살아온 집을 팔기로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그 결정은 고통이다. 괴로워하는 마릴라를 보며 집은 저들에게 주거공간을 넘어 삶의 뿌리이자 역사인가보다, 생각했다. 나도 아이가 커가면서 23평짜리 집이 좁게 느껴져 부동산에 내놓은 지 2년째. 그간 집은 팔리지 않고 평형 차별화(큰 평수일수록 값이 더 뛰는)만 가속화 돼 중산층 표준 평수라는 32평으로의 갈아타기는 더욱 어려워만 졌다. 얼마전 한 선배네에 가봤더니 거긴 또 다른 세상이었다. 37평에 사는 이분은 50평대로 가려는데 몇달 새 몇억이 뛰어버려 발만 동동이라는 것이었다. 37평대 1억 뛴대도 입을 쩍 벌리는 내 신세가 어찌 그리 지리멸렬하던지….

친구들은 다들 나보고 바보라 했다. “자면 뛰는 게 집값인데 대출 껴서라도 일단 사둬야지, 옛날 집 팔릴 때까지 죽어라 기다리고만 있는 사람이 어딨냐.” 겁이 많아 투자도 잘 못하는 나같은 이는 정말 이 사회의 신종 바보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꾸만 억울해지는 바보의 마음은 뭘까. 집이란 뭐라 해도 생활을 담는 그릇일텐데 식구들 몸피에 맞게 공간을 설계해가며 살아갈 최소한의 토대조차 안정돼있지 못한대서야 두려워서 어찌 세상을 살아가랴. 그런 측면에선 어쩌면 나부터 딸에게 한수 배워야 할지 모르겠다. 집이 안 팔려 손해만 봤다는 내 하소연 섞인 전화통화를 곁에서 엿듣곤 딸이 갑자기 이러지 않는가.

“엄마, 이 집을 왜 팔어. 나 여기서 어린이집 다니구, 친구들 데려와서 놀구, 추억이 가득 담겼는데 이 집 팔면 서운해서 어떻게 살아. 집 팔지마~.”

빨간머리 앤은 결국 집을 팔리게 놔둘 수 없다며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마릴라 곁에 눌러 앉는다. 딸은 본능적으로 그 앤에게서 가장 빛나는 황금은 집도 절도 아니라 유년의 추억이란 걸, 사람 살이의 넉넉한 여유란 걸 본능적으로 배웠나보다.

손윤정/ 프리랜서 작가 soksaram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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