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만 50살 생일 선물을 받았다. 손끝저림, 무릎 시큰거림, 그리고 눈침침으로 구성된 3종 선물세트였다. 아침에 일어나 손을 일 분 정도 잼잼 거려야 구브러진 손가락들이 펴진다. 나이드는 건 딱딱해지는 것인가 보다. 손가락이 딱딱해지고 어깨가 딱딱해지고 생각도 굳어가는 것이려나? 겁이 왈칵 난다. 무릎은 동네산을 한 시간만 걸어도 시큰댄다. 무릎의 통증을 쏙쏙 캐내라는 텔리비젼 광고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된 것도 요즘의 일이다. 그 뿐인가? 눈은 이미 지난 한 해 동안 하루하루 침침해졌다. 사전 글씨 들여다 보기가 고통스럽다. 혀끝의 감각도 예사롭지 않다. 국이나 찌개 간을 잘 맞추지 못해 계란찜은 싱겁고 된장찌개는 짜고, 겉절이는 달작지근하기 일쑤다. 모든 감각기관들이 서로 짜고 태업에 돌입한 것만 같다. 이러다 명랑하고 예쁜 할머니가 되려는 나의 원대한 목표에 차질이 생기면 어쩌지? 불길하다.
그러나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리는 법! 눈이 침침해 지는 건 아마도 눈에 보이는 것들만 믿고 살아온 지난 50년을 되돌아 보라는 하늘의 뜻이 아닐까?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육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그 세계에도 마음의 눈을 뜨라는 메시지일지도 몰라. 책읽기가 정점 힘들어 지는 건, 이제 책에 너무 의존하지도 갇히지도 말라는 뜻이렸다? 책을 읽으려는 자세로 자연을 읽고 하늘과 사람의 이치를 읽으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이제 나는 한 때 불같이 미워하거나 싫어했던 이들을 예전의 강도로 미워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우리 모두에겐 각자의 입장이 있게 마련이니 내 입장이나 관점만이 옳다고 더 이상 주장하지 않는다. 아무리 문제 투성이 인간이라도 20퍼센트 정도 쓸모를 갖고 있으며 아무리 정의롭거나 선한 인간에게도 20퍼센트 정도의 단점과 버릴 점이 있음을 볼 수 있게 되었다. 20퍼센트의 문제점 때문에 이제 남을 통채로 매도하지도 않으며 80퍼센트의 훌륭함을 가진 이를 무조건 숭배하지도 않는다. 개개인이 처해있는 맥락과 함께 한 인간을 읽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기특하다.
나이드는 것은 흔히 늙어가기 또는 낡아가기로 여겨진다. 그러나 ‘5학년’의 관점은 내게 전혀 새롭고 신선하다. 그도 그럴 수 밖에. 한 인간이 50년의 숙성과 발효를 거쳐 갖게된 새로운 조망권을 뜻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동안 나는 너무 나 자신에게 갇혀 살아온 것 같다. 다행히 이 새로운 관점은 남의 입장과 고통을 조금 더 이해하려 마음을 연다. 별것도 아닌 일에 기뻐할 수 있으며 반대편 입장에 선 사람의 주장이 타당함을 인정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불꽃같은 젊은 날의 사랑과는 멀어졌지만 타인에 대한 연민 능력은 조금씩 커져간다. 한 때 미워했던 남편과 다시 친구가 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연민은 사랑보다 더 힘이 센 것 같다.
10년 후 60살의 종합선물세트는 보다 더 ‘가혹한 구성’으로 나를 공격해 올지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태연히 살아갈 작정이다. 즐거운 할머니가 되려는 나의 꿈을 실천하면서. 박어진/ 자유기고가 behappy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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