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이맘때면 나는 햅쌀밥을 아침저녁으로 불룩하게 먹어대어 포동포동해진다. 가을 말들이 요즘도 살찌는지는 확인 할 길 없지만 대한민국 아줌마 하나가 날로 살찌는 건 확실하다. 어느 옛 중국 시인은 ‘서리 맞은 단풍이 봄꽃보다 곱다’고 노래했다지만, 내겐 불타는 단풍보다 익어가는 황금벌 볏논 빛깔이 더 그윽하다. 뭐랄까, 그 벼로 올 겨울 든든하게 배를 채울 수 있을 테니 익어가는 볏논 들판은 포만감과 아울러 정서적 안정까지 주는 셈이다. 논에 물 대어 농사 짓는 나주평야 출신인 내 안의 전라도 ‘아짐씨’ 본색일까?
근데 이상하다. 이 햅쌀밥에 아무도 열광하지 않는다. 햅쌀밥이든 헌쌀밥이든 이제 웬만한 사람들은 밥을 적게 먹으려 기를 쓴다. 헐벗고 배고팠던 시절엔 없어서 못 먹던 쌀밥을 이젠 살찔까봐 못 먹게 된 것이다. 이래저래 밥을 못 먹긴 마찬가지다. 쌀소비량은 해마다 줄어든다고 한다. 먹고 마시는 음식의 총량과 칼로리가 늘어난 때문에 대한민국 사람들의 체중이 급속히 늘고 있는 것일 텐데, 도대체 밥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일까? 다이어트하는 여성들에게 특히, 밥은 이미 공공의 적이 된지 오래다. 부당하다.
그러고 보니 요즘 우리 엄마 빼곤 아무도 내게 “밥 먹었니?”라고 인사하지 않는다. 밥 먹는 일은 이제 국민적 관심사 목록에서 빠져버린 모양. 모두들 밥 이외의 것을 찾아다니며 먹는 게 유행이다. 현란한 색의 조화를 내세우는 퓨전스타일 음식이 무대조명을 받고 이름 외우기 어려운 동서양 요리들이 앞다퉈 소개된다. 자극적인 외양과 맛을 갖지 않는 음식들은 왠지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도대체 밥보다 더 맛있는 게 세상천지 어디 있을까? 밥의 은은한 향기. 고소한 맛. 윤기 자르르한 모습, 단연 최강이다. 요란한 맛 없이 그저 담백하기에 밥은 평생 질리지 않는 유일한 식품이 된 것 아닐까? 그리고 이 밥 한 그릇엔 자식들 입에 따뜻한 밥 먹이느라 평생 솥뚜껑을 여닫으며 살아오신 우리 엄마와 외할머니들의 생애에 대한 우리들의 애틋한 기억이 있다.
누룽지를 빡빡 긁어 먹고 이도 모자라 남은 건 물을 붓고 끓인다. 결국 누룽지밥까지 풀코스로 먹는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설거지를 미룬 채 연속극 채널을 돌릴 차례다. 지금 이 순간, 이 세상에 아무 것도 바라는 게 없다.
박어진/ 자유기고가 behappy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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