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 청와대 상춘재 앞뜰에선 문재인 대통령이 기업인들과 간담회를 했습니다. 언론은 ‘넥타이를 푼 채, 호프를 손에 쥔, 덕담이 오가는 자리’라고 소개했습니다. 28일치 <한겨레> 1면에도 이 사진이 실렸죠. 사진 속 사람들이 죄다 노타이에 희거나 푸른 셔츠, 검은 바지 차림입니다. 얼굴을 가리면 누가 누군지도 모를 듯합니다. 무슨 유니폼도 아닌데 말이죠. 다른 나라도 국가 수반과 주요 기업인들이 모이면 이렇게 단조로운 모습이 되나요? ‘넥타이를 풀 필요 없는’ 여성이 단 한 명도 없을까요?
안녕하세요. 올 들어 여성가족부를 출입하고서야 겨우 이 땅 양성의 불평등한 현실에 조금씩 눈떠가는 남성 기자, 사회정책팀 박기용입니다. 까마득하게도 오랜만에 ‘친기자’로 인사드립니다.
우리가 이런 사진을 당연시하는 데엔 그럴 만한 배경이 있습니다. 지난 26일 여성가족부가 매출액 기준(금융보험업은 영업이익) 국내 500대 기업의 사업보고서를 전수조사했는데, 여성 임원이 406명에 불과했습니다. 비율로 따지면 고작 2.7%입니다. 나머지 97.3%는 당연히 남성이겠죠. 제가 속한 언론계도 그렇고 요즘엔 신입사원 가운데 여성의 비율이 더 많은 분야가 적지 않은데 기업의 여성 임원 수는 왜 아직 이 모양일까요.
조사된 기업 중 여성 임원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은 한국스탠다드차타드은행(SC제일은행)이었는데, 21.4%였습니다. 14명 중 여성이 3명이었고, 박현주(50) 부행장보와 사외이사인 대학 경영학부 교수 2명이 여성이었습니다. 18.8%로 2위인 한국씨티은행은 16명 중 3명이 여성이었습니다. 김정원(49) 부행장, 유명순(53) 수석부행장, 황해순(57) 준법감시인(상무)이 그들입니다. 3위 아모레퍼시픽은 70명에 이르는 임원 중 12명이 여성으로, 올해 성평등 문화를 확산시킨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습니다. 이들 여성 임원은 그야말로 입지전적 인물들입니다. 여성 임원 비율은 5위 국민은행 뒤로는 10% 아래로 떨어지고 10위 삼성에스디에스로 가면 7.1%를 기록합니다. 500대 기업 중 3분의 2에 이르는 336개 회사는 여성 임원이 아예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흔히 말하는 ‘선진국’들과 비교해보면 더 참담합니다. 지난해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가 공표한 ‘유리천장지수’(주요 기업의 여성 임원 및 관리직 비율)를 보면, 스웨덴은 여성 임원 비율이 35.9%나 됩니다. 미국은 20.3%, 영국도 25.5%입니다.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은 20.5%였고요. 한국은 오이시디 회원국 중 여성 임원 비율이 꼴찌였습니다. 500대 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이 2.7%이니, 당연한 결과겠죠.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하는 성격차지수에서 한국은 2010년 134개국 중 104위였다가 지난해 144개국 중 116위를 기록했습니다. 일부에선 ‘이미 여성 상위 시대, 남성 차별이 더 문제’라고 하는데, 터무니없는 소리일 뿐입니다. 양성평등의 문제만 놓고 보면 세계 10위권인 경제력 지위에 한참 뒤지는, 후진국일 뿐입니다.
높은 자리로 갈수록 여성이 적은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성 직원들의 근속기간이 길어지고 있긴 하지만 일과 가정을 양립하는 부담이 여전히 여성에게만 전가돼 있기 때문입니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남성 위주의 보수적 분위기에 눌리고, 관리자가 되기 전 퇴직에 내몰립니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확대가 관리직위 확대로 자연스레 연계되지 못하고 있”(여성가족부)는 것이죠. 금융보험업이 대표적입니다. 금융보험업계는 취업자 중 여성 비율이 53.7%(지난해)로 여성 취업자 비율이 가장 높은 산업입니다. 여성이 더 많죠. 그런데도 여성 임원 비율은 2014년 3.0%에서 지난해 2.7%로 오히려 떨어졌습니다. 남성보다 더 많이 취업하는데도 결혼과 출산, 육아를 거치며 결국 회사에서 내쳐지는 겁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공약으로 내건 ‘여성 장관 30%’가 그래서 소중합니다. 30%는 주먹구구로 나온 수치가 아닙니다. 여성이 한 집단에서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려면 최소 30%의 리더 자리를 확보해야 한다는 ‘임계수치’ 개념에서 비롯했습니다. 이 개념을 제시한 스웨덴의 정치학자 드루데 달레루프에 따르면, 30%가 확보되면 소수의 대표들이 상징적·예외적 존재라는 압박에서 벗어납니다. 다수에게 집중된 자원의 네트워크를 약화시키고, 권력 관계의 변화를 꾀할 수도 있습니다. 캐스팅보트를 쥔 소수가 전체 판을 좌우하는 원리입니다. 한데 우린 헌정 사상 처음으로 장관들만 겨우 30%를 넘길 모양입니다. 기업 임원은 아직 3%에도 못 미칩니다. 갈 길이 멉니다. 넥타이를 풀고, 호프를 손에 쥔 단조로운 남성들만의 사진이 마냥 좋게만 보이지 않는 이유입니다.
박기용 사회에디터석 사회정책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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