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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2050여성살이] “나도 사는데 너도 살아”

등록 2005-11-22 16:46수정 2005-11-23 13:55

초등학교 4학년인 조카의 요즘 취미는 소설 쓰기다. 몰래 훔쳐봤다가 절교를 선언 당할 뻔한 조카의 소설이 너무도 기상천외한 나머지 이모는 세상에 알리고픈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겠다.(미안하다!)

내용은 이렇다. 조카 나이뻘쯤 되는 여자 주인공은 집이 가난하고 공부도 못하고 게다가 너무나 못생겼다. 자살을 결심하고서 한강을 찾아 늘어놓는 넋두리. “난 세상 살 이유가 없어. 저 물에 뛰어들거야. 물이 너무 차가우면 다시 나올까? 아냐, 내 길은 이것 뿐이야.” 굳은 의지로 한발을 물에 담그려는 순간 누군가 주인공을 잡아끈다. “나도 사는데 너도 살아!” 뒤돌아보니, 전인권이다. 끝.

주인공이 전인권의 ‘설득’에 마음을 고쳐먹고 살기로 하는지, 아니면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 그를 설득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인지, 소설은 결말을 내리지 않은 채 끝이 났다. 이 소설을 읽고 충격을 받은 대목은 대략 세가지 정도다. 첫번째는 짐작하다시피 열살 남짓한 조카의 소일거리가 소설 쓰기라는 놀라움이다. 두번째는 자살을 결심한 주인공의 전형성이다. 가난하고 공부 못하고 못 생겨서 슬픈 아이가 생각해낸 것이 자살이라는 게, 세상의 고정관념이나 편견을 그대로 답습한 것처럼 보여 탐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기까지의 놀라움은 솔직히 어른의 전형성에 근거한 소설 읽기일 테다. 정말 유쾌했던 건 세번째 이유. “나도 사는데 너도 살아”라고 말하는 이가 전인권이라는 발상이다. 조카가 보기에 전인권씨는 세상을 살만한 이유가 별로 없는 것 같은데도 꾸역꾸역 열심히 살아가는 인물의 전형인가보다. 하긴 너무도 독특한 그의 외모와 목젖 터질 듯 외쳐도 걸걸댈 뿐인 그의 노래로 짐작해보면 아저씨가 그리 부자이거나 공부를 잘했을 것 같지도 않겠다. 아직은 누구에게도 읽히고 싶지 않은 습작을 들켜버린 조카에게 혼이 나면서도 얼마 동안 행복했다. 그리고 전인권이라는 인물이 그리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원래도 사랑한다) 10살 꼬마에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근사함’말고도 세상 사는 이유란 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그가 깨닫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나도 사는데 너도 살아”라는 말은, 잘나지 못한 사람이 잘난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세상이 말하는 것과는 다른 행복과 자유를 꿈꾸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라는 걸 알겠다. 그래서 나도 10살 꼬마에게 전인권과 같은 사람이고 싶다. 안 예쁘고, 화장도 안하고, 나이 들어 결혼할 생각도 안 하는데다, 하고 싶은 일만 하는 나를 보고 “저 사람의 세상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해하는 한 명의 꼬마만 있다고 해도, 내가 대한민국 교육에 이바지하는 공로는 충분하다고 본다.

정박미경/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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