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진 돌봄 값싼 대우 (하) 돌봄노동도 돌봄이 필요해!
맞벌이 어린 자녀들 지켜주고
어르신 식사·빨래 살펴주는 일
정부는 비용 아끼려 민간에 맡겨
시민 전생애에 필요한 좋은 돌봄
성별·나이 상관없이 주고받는
복지국가 모델 지향점 삼아야
맞벌이 어린 자녀들 지켜주고
어르신 식사·빨래 살펴주는 일
정부는 비용 아끼려 민간에 맡겨
시민 전생애에 필요한 좋은 돌봄
성별·나이 상관없이 주고받는
복지국가 모델 지향점 삼아야
지난해 8월 김상곤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과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 최교진 세종시교육감 등이 한 초등학교 돌봄교실에 방문해 온종일돌봄체계 구축 의지를 밝히고 있다. 사진 교육부.
<돌봄노동도 돌봄이 필요해!>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명제가 언제나 참이듯, 살아있는 인간은 타인의 돌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언제나 참이다.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야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이 돌봄의 가치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과거 ‘가족 내 여성’이 맡던 일을 ‘가족 밖 여성’에게 싼값에 떠맡기고 있을 뿐이다.
전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저출산·고령화를 겪고 있는 우리 사회가 이 문제를 극복하려면 ‘돌봄노동’을 복지의 근간으로 하는 ‘돌봄국가’를 지향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누군가가 싼값에 돌봄을 계속 공급해줄 거라 기대하는 대신, 돌봄의 가치를 제대로 매겨 새로운 유효수요를 창출하는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10년의 보수 정권하에서 전근대적 가족관을 기조로 삼은 가족정책에 따라 돌봄노동은 여전히 저평가돼 있고 여성 쏠림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핵가족화와 1인가구의 증가, 혼인율 감소 등 달라진 가족의 모습을 반영해 가족 정책을 재정립했어야 하지만 때를 놓쳤다는 것이다. 사회활동을 남성이, 가정 내 돌봄을 여성이 맡는 전근대적 가족관은 돌봄노동을 여전히 저평가의 굴레에 가두고 있는 점도 극복해야 할 과제다. 돌봄노동의 공공성을 높이기 위해 문재인 정부가 공약한 사회서비스진흥원을 제대로 세우고, 돌봄노동자들의 조직화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 한겨레 사회부 사회정책팀-
‘무료 자원봉사 의존’ 고질화
교육부의 2017 초등돌봄교실 길라잡이(매뉴얼)
국가의 돌봄 책임 축소하기만 이태수 꽃동네대 교수(사회복지학)는 “과거에는 노동자에게 소득을 보전해주거나 각종 지원을 해주면 가족 기능이 정상화되리라 봤는데, 이제 가족 자체가 형성되지 않는 상황이다. 우리는 2000년대에 와서야 돌봄의 사회화, 돌봄서비스 발전을 이야기했지만 이마저도 지난 10년간의 보수 정부가 돌봄의 국가책임이란 원칙과 기조 없이 가족정책을 다루다 보니 ‘건강가정기본계획’에도 돌봄에 대한 정부의 종합적 역할이 빠져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 남성은 왜 돌봄노동을 하지 않나 생애 주기에 따라 필요한 각종 돌봄서비스 직종에는 대체로 중장년 여성들이 진입해 일하고 있다. 돌봄노동이 가족 내 비공식 영역에서 가족 밖으로 사회화, 공식화했지만 여전히 여성의 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돌봄노동이 ‘여성화’된 이유로 아동 성범죄 등 현실적 문제를 꼽기도 한다. 교육부 관계자는 “초등돌봄전담사는 전국에 1만2천여명이 있는데, 성별 통계는 없지만 남성이 있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다”며 “학부모로서는 요새 (아동 성범죄 등으로) 흉흉하니 여학생을 맡기기에 불안감이 있을 수 있고, 학교장이나 교육청도 남성을 채용하기 부담스러운 게 아닐까 추측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요양보호사나 장애인 활동보조인 등 남성 노인과 남성 장애인을 돌보는 영역에서 일하는 여성 돌봄노동 종사자들은 역으로 성희롱이나 성폭력 위험에 노출된다. 서울연구원과 보건복지자원연구원의 2013년 조사를 보면, 재가요양보호사 중 19.1%, 시설요양보호사 중 52.9%가 ‘성희롱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최근 서울시 어르신돌봄종사자 종합지원센터가 낸 노동상담 사례집을 보면, “어르신(서비스 이용자)이 ‘살이 뜨끈뜨끈하네’라며 성적인 말씀을 해 최대한 차분히 대처하려 노력했다”거나 “이용자의 남성 배우자가 어느 날 술을 먹고 들어와 양쪽 손목을 꼼짝 못하게 잡고는 ‘왜 이렇게 예쁜지 모르겠다, 우리 집에 돈 많으니 갖다 쓰시라’고 했다. 심장이 떨리고 모욕당한 기분이었다”는 얘기들이 나온다. 노골적으로 성적 관계를 요구하거나 나체사진을 보여주는 등의 사례도 있었다. 남성 요양보호사였다면 어땠을까.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남성 요양보호사가 지역 내 요양시설에서 노인 환자의 식사를 돕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노인요양 전문누리집 ‘케어페이지’(CarePage) 제공
외국에선 남성노동자도 많아 석재은 교수도 “돌봄노동에 남성이 편입되지 않는 것은 이 노동의 가치가 평가절하돼서 그렇다. 과거 미용, 헤어디자이너 등은 여성의 일자리로 인식됐지만 시장에서 고평가되고 나니 남성도 많이 진입하지 않나. 돌봄노동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된다면 우리도 외국처럼 남성이 돌봄노동을 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 ‘돌봄국가’를 꿈꾸자 돌봄노동의 저평가를 해소하려면 돌봄노동 그 자체의 사회적 가치에 주목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008년 처음 시작해 현재 전국 36만여명이 종사하는 장기요양보험제도의 요양보호사들의 경우 정부가 2010년부터 본격적인 처우개선 등 제도 정비를 시작했다. 요양보호사 교육기관 설립 신고제를 정부 지정제로 바꾸고, 자격취득 시험제를 도입하고 요양보호사들의 인건비로 연결되는 수가도 인상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정부는 요양보호사 본연의 업무인 노인 신체 수발, 가사 등 돌봄서비스가 아닌, 의료·보건·행정 등 ‘전문성 획득’을 요양보호사들에게 요구했는데, 이런 식의 접근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영애 서울사이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돌봄노동자에게 사회가 ‘전문성’이 있다고 일컬어지는 다른 요소를 추가로 갖출 것을 요구하게 되면 돌봄노동 자체의 본질적 요소들이 한층 평가절하될 가능성이 있다. 돌봄 그 자체에 대한 가치가 높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순심 재가 요양보호사가 2월27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한 아파트에서 할머님과 함께 스트레칭을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경력·숙련도 따라 대우 달라야 전문가들은 이를 위해 먼저 돌봄노동 종사자들이 장기 전망을 갖고 독립적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수준의 임금체계를 갖추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요양보호사의 경우 50~60대 여성 장년층이라는 특정 인구그룹을 대상으로 설계된 업무여서는 안 되며, 경력과 돌봄 숙련도를 임금에 반영해 숙련된 요양보호사일수록 더 많은 임금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양난주 대구대 교수(사회복지학)는 “누구든 이 일로 독립적 생계를 유지할 임금이 돼야 한다. 돌봄 일자리는 정부의 사회보험료와 조세를 통해 작동하고 있다. 시장에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며 “돌봄노동의 일자리 질은 원래 낮은 것이 아니라 정부와 사회 인식이 반영된 결과다. 정부가 돌봄직종을 어떻게 사고하느냐가 일자리의 질을 좌우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정부는 돌봄에 필요한 비용을 아끼려 서비스 공급을 아예 민간 시장에 맡겨두거나 돌봄노동자의 임금을 제한적으로 인상하는 방법을 써왔다. 이런 방식은 ‘모두가 모두의 돌봄을 필요로 하는’ 본격화된 저출산·고령화 상황에서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돌봄의 사회화가 반드시 필요한 과제라면, 아예 새로운 복지국가의 모델로 사회 구성원 모두가 서로의 돌봄에 기대고, 이를 국가 운영의 근간으로 삼는 ‘돌봄국가’를 지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저임금 여성 일자리’인 돌봄노동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될 때 비로소 새로운 복지국가의 가능성도 점칠 수 있다는 것이다. 김희강 고려대 교수(행정학)는 2016년 <정부학연구>에 실은 논문 ‘돌봄국가, 복지국가의 새로운 지평’에서 “새로운 복지국가의 상으로 돌봄윤리를 규범적 원리로 운영되는 ‘돌봄국가’를 지향하자”며 “돌봄은 인간의 생애 주기에서 필수적이며 돌봄을 받는 상태를 비정상이 아닌 정상으로 인식하고 성별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모든 시민이 ‘좋은 돌봄’을 주고받을 수 있는 상태를 국가의 지향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김미향 박기용 기자 aroma@hani.co.kr
관련기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