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비서를 위력으로 성폭행한 혐의 등을 받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지난 2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부지방법원에서 열린 첫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서울방송>(SBS)은 지난 2일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 가해 혐의 재판을 보도하면서 피해자인 김지은 전 수행 비서가 법원에 증거로 제출한 개인 진료기록 내용을 처음 기사로 공개했다. 이후 언론들은 앞다퉈 이 기록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데일리>는 해당 자료 내용을 처음 제목으로 부각했다. 제목은 점점 선정적으로 바뀌었다. 3일 <중앙일보>와 <월간조선>은 병원 정보를 구체적으로 제목에 명시했고, <국민일보>와 <조선일보>는 자극적인 단어를 활용해 진료기록 내용을 제목에 사용했다. 이렇게 피해자의 민감한 개인 진료기록은 언론 보도를 통해 널리 공표되고 말았다. 게다가 여러 보도 제목에서 피고인은 사라지고, 오직 피해자의 이름만 부각됐다.
종합편성채널 시사토크 프로그램의 자막도 선정성 경쟁을 한 것은 마찬가지다. “셀프 호텔 예약”, “리조트에서 무슨 일이?”(티브이조선), “지사님, 저 울어도 되죠?”(채널에이)가 대표적이다. “‘비서 마누라’로 불렸다”(채널에이)처럼 일방적으로 피고 쪽에 유리한 증언을 자막으로 뽑거나 피고인, 피고인의 배우자, 피해자 세 사람의 사진을 ‘삼각관계’ 구도로 묘사한 뒤 ‘이리보고 저리봐도’(티브이조선)란 자막을 사용하기도 했다.
■ “개인 진료기록도 공개한 언론…댓글로 인한 ‘2차 피해’ 유도”
“의료법에도 진료기록 열람 및 사본 발급 요건이 별도로 명시돼 있을 정도로 개인 진료기록은 가장 내밀한 정보다. 이 자료를 제출했다고 해서 언론이 보도해도 된다고 허가받은 게 아닌데 일부 언론은 마치 누가 더 천박하고 선정적인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제목을 뽑을까 경쟁하는 것 같았다.”
김언경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은 성폭력 보도에 대한 윤리와 고민은 사라지고, 스포츠 경기처럼 중계하는 보도에만 매달린 언론에 대해 이렇게 지적했다. 26일 오전 서울 서교동 창비서교빌딩에서 열린 ‘위력에 의한 성폭력과 2차 피해 토론회’에서다.
이날 토론회에선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위계에 의한 성폭력’ 혐의 재판 상황을 보도하고 있는 언론과 재판을 진행하고 있는 담당 재판부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이 오갔다. 350개 시민단체가 모인 ‘미투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이 주최하고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의전화, 민주언론시민연합이 주관한 토론회다. 이 자리에는 10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발 디딜 틈 없이 강당을 꽉 메웠다. 김수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배복주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상임대표, 김언경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 장임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권김현영 여성주의 연구 활동가가 발제자로 나섰다.
사법부가 성폭력에 대한 ‘2차 가해’가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을 제공했다면, 언론은 기꺼이 ‘2차 가해 확성기’를 자처했다는 비판도 나왔다. 재판 내용을 ‘막장 드라마’처럼 자극적으로 중계하고 증언 내용 일부만 인용해 선정적인 제목을 붙이는 등의 보도를 통해서다. 김 사무처장은 이날 ‘보도 참사’에 가까운 사례를 소개하며 “성폭력을 없애야겠다는 취지의 보도는 없고 오로지 재판 중계로 기사 클릭 수를 높이겠다는 목적뿐이니 그 과정에서 거리낌 없이 공개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
김수아 교수는 이같은 언론 보도가 현재 성폭력을 고발한 사람에게 고통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이후 성폭력 관련 증언을 하는 일 자체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굳어지게 하고, 또 다른 성폭력 고발을 아예 차단해버리는 부작용도 있다. 김 교수는 “온라인 공간에서 일어났던 댓글로 인한 2차 피해를 언론이 견인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교수는 특히 피고인의 주장을 직접 인용하는 제목을 문제 삼았다. 해당 주장의 진실성을 다툴 여지가 있는데도 따옴표를 활용해 제목에 인용할 경우 독자들은 마치 이미 입증된 사실인 것 마냥 받아들이게 된다는 비판이다. 그는 “언론은 제목에 ‘새 국면’, ‘새 증거’와 같은 단어를 사용해 프레임을 만들면서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게 하는 방향으로 기사를 작성한다”며 “형식적인 객관보도보다 보도윤리가 권력문제나 피해자 보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부터 고민을 했어야 한다. 특히 성범죄 보도를 왜 하는지 원론적인 점검부터 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26일 서울 서교동 창비서교빌딩에서 열린 ‘위력에 의한 성폭력과 2차피해’ 토론회. ‘미투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 페이스북
■ “안 전 지사 쪽 증언만 공개한 재판부 판단 안일해”
발제자들은 안 전 지사의 사건을 맡은 서울서부지법 형사11부(재판장 조병구)의 결정이 경솔하고 무책임하다고도 입을 모았다. 특히 안 전 지사 쪽 변호인단이 공판준비기일부터 “김지은 전 비서가 피해자일 수 없는 이유를 증명해 보이겠다”며 ‘피해자답지 않은’ 평소 행실과 평판을 공개하겠다는 변론 방향을 밝혔음에도, 피고인 쪽 증인신문 대부분을 공개재판으로 진행한 점을 비판했다. 이는 성폭력 범죄 재판에서 ‘2차 가해’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변론 전략인 데다, 안 전 지사와의 관계가 강압적이었다고 주장하는 피해자 심문과 검찰 쪽 증인신문 대부분은 비공개로 진행되면서 ‘증언의 비대칭’ 현상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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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복주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상임대표는 “증인을 채택할 때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피고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말할 것이 예측이 된다면, 재판부가 성폭력 사건의 특성을 이해하고 비공개 처리를 하거나 (해당) 증인을 채택하지 않는 고민이 있어야 했다. 특히 피고인의 배우자가 증인으로 왔을 때는 비공개 처리가 됐어야 한다”며 “이번 사건에서는 (해당 증언이) 언론에 다 공개되며 결론적으로 ‘피해자가 피고인을 좋아했다’, ‘최대 피해자는 피고인의 배우자다’ 이런 프레임이 생겨났고 이는 상당한 문제”라고 비판했다.
김언경 민언련 사무처장 역시 사법부와 언론의 책임을 함께 언급했다. 김 사무처장은 “언론에 주의를 요청했어야 하는 사법부가 너무 부실하게 생각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여론 재판이 이뤄지면 실제 재판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이걸 막고 통제해야 할 책임은 사법부에 있다”고 꼬집었다. 언론에 재판 과정을 일부 공개한다는 방침이 너무 안일했다는 지적이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김 사무처장은 “탐정 놀이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상세하게) 관련 내용이 나오고 있는데 (그런 흐름에) 놀아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성폭력 사건 보도를 이번처럼 대대적으로 하는 것이 저널리즘에 적절한지, 사회적인 성찰과 자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영장실질심사가 예정되어 있던 지난달 26일 오후 안 전 지사가 심사에 출석하지 않으면서 서울서부지법 앞에서 안 전 지사를 기다리던 취재진들이 자리를 정리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 “피해자의 발언은 일관되고 명확해…이길 수밖에 없을 것”
이들은 안 전 지사의 재판이 앞으로 ‘위력에 의한 간음죄’에 대한 ‘지표’와 같은 사건이라고 입을 모았다. ‘위력이 발생한 상황’을 강간죄 구성 요건으로 판단하는 판례가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재판 결과에 따라 ‘위력에 의한 간음죄’를 다루는 법 조항이 개정될 수 있고,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사법부의 관점이 새롭게 정립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고 봤다. 재판 결과에 대해선 “(피해자가) 이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내다봤다.
사건이 알려진 직후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를 꾸려 활동하고 있는 배복주 상임대표는 “피해자의 진술이 매우 일관된다. 실체적 진실과 정황상 맥락에 대해 정교하게 진술했기 때문에 증거로서 충분하다. 오히려 피고인 쪽 증언이 대부분 다 감정에 기반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원고 쪽은 직접 본 것과 경험한 것을 이야기한 반면 피고 쪽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식으로 대응하는데 후자는 증언으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주장이다. 배 상임대표는 “(비공개 증언 중) 피해자의 진술을 뒷받침할 수 있는 진정성 있는 증언들이 있었다. 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피해자 진술의 힘을 믿는다”라고 강조했다.
권김현영 여성주의 연구활동가는 “재판을 방청하면서 안 전 지사 쪽은 이 사건을 어떤 방식으로든 정파적인 사건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을 봤다. 구체적인 증거가 없으니까 피해자 주변 정황을 이용해 (피해자 개인을) ‘믿을만한 사람’이 아닌 것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집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2000년대엔 ‘위력에 의한 간음’과 같은 판결에서 많은 경우 무죄가 나왔다. 하지만 (‘미투’ 운동을 통해) 사회는 큰 변화를 요구받은 것”이라며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면 법정에서 이에 대한 응답이 있어야 한다. 이번 사건은 ‘권력의 남용’이란 관점에서 안 전 지사에게 큰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장임다혜 부연구위원은 “실제로 행위자가 상대방의 의사를 제압하려는 행위를 했는지, 그것이 제압인지를 행위자가 인식하고 있었는지가 쟁점이다. ‘우월적 지위’가 (사건의)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장 위원은 “이런 사건에 대한 과거 판례가 없어 재판부로선 본인들이 일종의 기준을 제시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을 것”이라면서도 “업무상 위력이 갖고 있는 사회적인 영향력을 (재판부)가 고려해줬으면 한다. 법망에서 잡히지 않는 착취적인 관계가 한국 사회에 존재하고, 이로 인해 발생한 성폭력 사건이 너무 많다. 이런 사건은 폭행이나 협박이 동원되지도 않고, (관계의 특성상) 당연히 저항도 없다. 이런 일이 계속 존재하는 상황에 대해 사회적으로 주의가 환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결심 공판은 27일 오전 10시부터 서울서부지법에서 진행된다. 이르면 8월 중순께 1심 선고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박다해 황금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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