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밥은 대개 점심을 겸해 느지막이 먹게 된다. 과일과 차를 마실 무렵엔 제법 가족 세미나 분위기가 난다. 화제는 아이들의 학교 생활, 친구들 이야기, 그리고 용돈 사용 문제 등등. 평소 부족한 아빠 노릇을 조금이라도 더 해보려는지 남편은 아이들과 얼굴을 맞대는 이 시간을 좋아한다. 문제는 가르치는 일이 직업인 남편의 말이 아무래도 길어지기 십상이라는 것. 일종의 직업병 증세다. 아이들이 즉각 저지에 나선다. “아부지, 프리젠테이션은 2분 이내로 해주세요. 발표 내용을 압축해주시구요.” 맘이 상한 남편이 가만 있지 않는다. “뭐야, 아빠 말은 모두 다 잔소리로 들려? 듣기 싫어도 아빠가 말할 때는 좀 참고 들어야지.” 볼멘 소리를 내뱉는다. 아이들도 만만치 않다. “아니, 아부지 말씀을 안듣겠다는 게 아니구요. 요점 정리를 해주시라는 거죠. 남을 지루하게 하는 건 범죄잖아요?”
여럿이 밥먹으러 가면 서열 순대로 말을 많이 한다. 또는 밥값 내는 사람이 떠들 권리를 가진다고나 할까. 집에서도 은연 중 몇 십년째 가족 밥값을 도맡아 내는 아버지가 많이 말할 권리를 갖는 게 아닌가? 유교적 분위기에서 자란 40대나 50대 중년들은 어릴 적 어른들의 말에 토를 다는 건 금기며 무례함으로 여겼다. 어른들의 말씀에 대한 아이들의 반론권은 극도로 억압받았다. 말대꾸는 당연히 엄하게 다스려졌다.
아이들은 때로 한없이 길어지는 어른들의 말을 한 귀로 흘리거나 견디며 성장해간다. 그리고 장벽을 쌓는다. 어느 한쪽의 말이 길어질수록, 듣는 쪽의 말대꾸 권리가 보장되지 않을수록 의사 소통은 힘들어진다. 아이들과의 커뮤니케이션 단절을 호소하는 아빠들의 사례에 이런 일방통행주의의 문제점이 있는 걸 종종 본다. 아빠들은 억울하다. 어릴 적엔 어른들 말씀을 꾸벅 경청하며 복종을 미덕으로 알았으니까. 그런데 이제 자식들은 아빠들에게 목소리를 낮추라고 한다. 낀세대의 비애랄까. 밑지는 기분에 서글프기까지 하다.
아이들에게 아빠의 생각을 길게 말하기보다 질문을 던지는 아빠가 되는 건 어떨까? 아이들에겐 아빠의 말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생각할 동기를 부여하고 그 덜 다듬어진 생각을 경청해 주는 아빠가 더 필요할 수도 있을 테니까. 때로 마구 대들고 말대꾸하는 아이들에게 화를 낼 게 아니라 그들의 속마음을 읽어내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겠다.
아빠들은 살아오면서 갈고 닦은 비장의 생존 전략을 송두리째 자식들에게 전수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조급한 마음에 말이 많아 지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스스로의 방식을 찾아내도록 돕는 방법도 나쁘지 않다.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아이들이 중구난방으로 떠들어 대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 아빠의 몫이다. 정리되지 않은 아이디어들을 짧게 평가해주고 다음 단계의 생각과 말을 가다듬을 수 있게 도움까지 주면 어떨까? 가족 구성원들의 열렬한 지지와 환호가 뒤따를 것이다. 박어진/ 자유기고가 behappy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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