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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우리에겐 ‘인공임신중절’에 대한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등록 2018-12-24 17:00수정 2018-12-24 19:41

책 ‘배틀그라운드’ 출간기념 북토크
“헌재가 낙태죄에 대한 급박함 알아야”
임신중지 가능해져도 보건의료시스템 뒷받침 돼야
지난 22일 오후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열린 책 <배틀그라운드> 북토크 현장. (왼쪽부터) 백영경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 윤정원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여성위원장, 나영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적녹보라의제행동센터장, 류민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 성과재생산포럼 제공
지난 22일 오후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열린 책 <배틀그라운드> 북토크 현장. (왼쪽부터) 백영경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 윤정원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여성위원장, 나영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적녹보라의제행동센터장, 류민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 성과재생산포럼 제공
경남 남해경찰서가 특정 산부인과를 이용한 여성들에게 공문서와 전화로 ‘업무상 촉탁 낙태죄’ 참고인 조사 출석을 요구하고 ‘낙태’ 여부를 취조하는 등 반인권적인 수사를 강행했다는 사실이 지난 21일 드러났다. 경찰은 조사에 임한 여성들에게 ‘낙태한 적이 있는지’를 물었고, 한 여성은 “임신을 하려고 노력했으나 잘 안 됐고 결국 사산해 치료받았다”는 사실을 진술해야 했다고 한국여성민우회가 밝혔다. 민우회는 “이미 수많은 여성들이 임신중절 불법화로 어떠한 사회적 지원도 없이 홀로 불법수술을 감당해야 하는 인권침해 상황에 처해 있다”며 “현행법이 놓인 현실적·사회적 맥락과 의미에 대한 고려 없이 이러한 색출 조사를 진행하는 것은 공권력에 의한 폭력”이라고 규탄했다.

남해에서 일어난 이 ‘색출사건’은 한국사회에서 낙태죄가 놓인 모순된 지형의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류민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는 22일 오후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 50주년기념홀에서 열린 책 <배틀그라운드: 낙태죄를 둘러싼 성과 재생산의 정치>(후마니타스) 출간기념 북토크 자리에서 “헌법재판소가 형법상 낙태죄 위헌 여부에 대한 판단을 지연하는 동안 이런 일이 발생했다. 급박함을 헌재에서 알아줬음 좋겠다”라며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이날 북토크에는 <배틀그라운드>를 기획한 ‘성과재생산포럼’ 소속 윤정원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여성위원장, 나영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적녹보라의제행동센터장, 백영경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문화교양학과), 류민희 변호사 등이 함께 자리했다. 백 교수는 “형법상 낙태죄가 사문화 돼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여전히) 지역 경찰들이 여성에게 접촉할만큼 살아있는 힘을 갖고 있다고 느꼈다”라며 “‘낙태가 죄라면, 범인은 국가다’ 이런 이야기를 계속 해왔는데 그런 국가에서 살다보니 우리의 지평이 좁아졌다. 인공임신중절을 둘러싸고 어떤 다양한 실천이 있을 수 있는지 살펴봐야한다”고 했다.

‘형법상 낙태죄’가 폐지되면, 여성은 자신의 몸에 대한 건강권을 저절로 획득하게 되는걸까. 윤정원 위원장은 임신중지 전후로 충분한 보건의료시스템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2012년에 임신중절이 합법화된 우루과이의 사례를 들었다. 우루과이는 임신중지 전에 임신중지 이외의 방안들은 어떤 것이 있는지 상담을 제공하고, 여러 임신중지 방법과 각각의 장단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임신중지 뒤에는 여성 몸의 손상을 예방하고 필수적인 재활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우루과이 모델은 “양심을 가진 인격적 존재로서 여성은 그 자신의 생명과 건강에 관해 최선의 선택을 내릴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사람”이란 인식을 기반으로 한다.

윤 위원장은 “모자보건법상 ‘건강’의 정의도 적극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했다. 현행 모자보건법 14조는 “임신의 지속이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 인공임신중절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세계보건기구(WHO)의 건강 정의에 따르면 신체적 건강 뿐만 아니라 ‘정신적 건강’까지 인정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윤 위원장은 “법을 하나 바꾼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법을 바꾸기 전까지 아무 것도 못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실제로 콜롬비아에선 재생산권을 지지하는 의료인 단체들이 문제를 제기해 관련 법 조항에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다 넣는 식으로 법이 바뀌었다. 더 많은 보건의료인들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낙태죄를 규정한 형법 269조를 폐지하고, 모자보건법을 전면 개정하는 것을 넘어 ‘혁명적 기술’로 불리는 인공임신중절 약물에 대한 논의도 보다 적극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나영 센터장은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는 것은 임신중지가 아니라 필요한 의료조치·시설에 대한 접근성의 제약, 정보 차단, 차별과 낙인, 불필요한 동의나 제약조건들”이라며 약물적 임신중지에 대해 탈의료화, 비범죄화, 비낙인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단지 여성이 스스로 약물적 임신중지를 선택할 수 있는 것 자체가 핵심이 아니라 정확한 복용량으로 제대로 된 약을 복용할 수 있게, 또 어떻게 사용할지, 문제가 생기면 어디로 가야하는지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도 함께 만들어져야 한다. 보건의료의 공공성과 안전망, 임신중지를 건강과 권리의 문제로 다루는 보건의료인의 양성과 훈련, 정보·지식에 대한 접근권, 장애·연령·이주상태 등을 이유로 한 차별·배제·낙인의 제거, 성별이분법·이성애·남성·가부장 중심의 사회적 인식과 조건들을 변화시키는 일이 수반돼야 한다.

낙태죄에 대한 논의는 결국 개인의 기본권에 대한 국가의 통제문제와도 연결된다. 나영 센터장은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과정이 모두 재생산권과 연결돼 있다”며 “(재생산권에 대한 논의를 위해) 인구관리와 생명선별을 주도해오면서 그 책임은 여성들에게만 전가해 온 한국에서 국가와 사회의 책임과 역할을 묻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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