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배기 곰국이 제값을 받는 철이다. 어릴 적 한밤중에 곰국 담긴 자배기를 머리에 이고 들이닥치던 외할머니가 그립다. 눈까지 내린 밤, 외할머니는 그렇게 불시에, 외동딸인 우리 엄마에게 먹이려고 하루종일 곤 곰국을 무거운 옹기 자배기에 가득 담아 이고 한 시간을 걸어 우리집에 오시곤 했다. 통행금지가 있던,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다. ‘순경’을 만나면 한 그릇 떠먹이고 입막음을 하려 하셨다나. 통행금지를 태연하게 위반하시던 간 큰 외할머니의 소원은 딸이 그저 “국이 식지 않을 만한 거리”에 살았으면 하는 것 뿐이었으니.
학교 교육을 받아본 적 없으신 외할머니는 그러나 탁월한 유머 감각을 지니셨다. 여름 제삿날 큰외갓집 부엌. 할머니는 이 여성들의 작업 공간을 웃음판으로 바꾸는 탁월한 엔터테인먼트 제공자셨다. 남편과 시집살이 흉 뿐이었을까? 모시 두루마기 차려입고 누마루에 그윽하게 앉아 여름 낮시간을 소일하는 남성 제주들의 행태를 살짝 비틀고 비꼬는 풍자 사설 일인극을 펼쳐 내셨다. 때로 “염병할 놈, 쳐죽일 놈” 등의 극언도 서슴지 않고 사용하셨으니. 엄숙·경건한 남성 중심 의전과 여성들의 모둠 노동이 공존하는 제사의 구조. 외할머니는 그 한 축을 완벽하게 장악하시며 여성들의 마당을 파티 공간으로 바꾸셨던 것이다.
외할머니에 대한 또 하나의 기억. 내가 초등학교 6학년였을 때였다. 중학교 입시 압박에 시달린 나로서는 학교엔 가기도 싫었다. 어느날 아침 학교 가는 척 집을 나섰다. 발길 닿는대로 걷다보니 외가. 오전 새참을 논에 내가려고 막걸리 주전자를 손에 든 외할머니가 막 집을 나서려던 참이셨다. 내 행색을 한 눈에 읽어버린 외할머니는 빙긋 웃으시며 소쿠리를 내려놓으셨다. 부엌에서 국사발을 하나 꺼내오시더니 막걸리를 가득 붓고 누런 황설탕을 한 숟갈 넣어 손가락으로 휘휘 저으시더니 내미시며 한 말씀. “그 깟 공부 못하면 어때서? 우리 애기 사주에 밥그릇이 아주 커. 뭐가 걱정이냐? 밥 먹고 살면 됐지.” 왠지 엄청 안심이 된 나는 난생 처음 마신 막걸리 한 사발에 취해 그만 평상에서 낮잠이 들었다. 깨어나니 초저녁. 외삼촌의 놀림을 받으며 나는 외할머니가 끓여주신 시래기국을 해장국 삼아 훌훌 마시고 발걸음 가볍게 집으로 돌아왔다. ‘엄호’ 차원에서 집까지 바래다 주신 외할머니와 함께.
외할머니는 99살에 평화롭게 떠나셨다. 그리고 ‘밥 먹고 살면 됐지’란 외할머니의 유전자는 나를 거쳐 두 아이들에게까지 상속되었다. 더도 덜도 말고 외할머니가 내게 주셨던 만큼의 사랑과 기쁨을 주는 그런 외할머니가 되고 싶다. 외할머니께 진 사랑의 빚은 그 분께 되갚을 수 없다. 그 빚은 내리 사랑으로 갚게 되는 게 사랑의 제1공식이잖은가?
박어진/ 자유기고가 behappy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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