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이 3일 오전 서울 마포구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 소장 뒤로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매달 내놓은 `성폭력 조장하는 대법원 판례바꾸기 운동 해설집'이 놓여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한국 사회가 ‘성폭력’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해야 돼요. 그게 지난해 ‘미투’ 운동이 우리 사회에 던진 물음인 거잖아요.”
지난 3일 <한겨레>와 만난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미투’ 운동을 통해 드러난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형법상 강간죄로는 ‘내 피해가 피해로 인정되지도 않아 이게 정의냐고 묻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를 비롯해 전국 208개 여성인권단체는 올해 3월부터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를 꾸려 강간죄 개정을 위한 운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 국회에는 형법 297조 강간죄의 ‘폭행 또는 협박’이란 구성요건을 ‘의사에 반하여’ 또는 ‘동의없이’로 바꾸는 개정안이 10건 발의돼 있다. 이례적으로 원내의 5개 정당이 모두 발의한 개정안이지만, 국회 논의는 지지부진하다. 법무부 역시 소극적인 입장이다.
지난해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위력에 의한 성폭력’ 사건을 계기로 ‘비동의 간음죄’가 다시 공론화됐지만, 사실 이 소장에겐 해묵은 숙제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2006년∼2007년 남성중심적·가해자중심적인 성폭력 판결을 바꾸기 위해 ‘대법원 판례 바꾸기 운동’을 전개한 바 있다. 현행 법 제도와 판결의 문제점에 대해 각계 전문가들과 함께 논의한 결과를 정리해 매달 대법관, 전국의 부장 판사·검사에게 보냈다. 여성인권법연대와 함께 ‘비동의 간음죄’가 담긴 형법 개정안을 만들었고, 2007년 2월 임종인 의원이 이를 발의하기도 했다.
“어떻게 피해자의 경험과 목소리는 다 소거한 채 여성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반영한 판결을 할 수 있냐, 성폭력을 ‘정조에 관한 죄’로 바라보는 1950년대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냐는 문제제기를 한 거죠. 법조인 한 분은 ‘의미있는 일’을 하고 있다며 상담소로 후원금을 보내주시기도 하셨고, ‘이렇게 기소했는데 법원이 잘 안 들어준다’는 검사도 계셨어요.”
귀를 기울이는 일부 법관은 있었지만, 변화의 물결을 만들긴 어려웠다. 사회적 분위기가 뒷받침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토양이 만들어지는데 10여년이 걸렸다. 이 소장은 “‘미투’ 덕분에 이제야 우리 사회가 ‘비동의 간음죄’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성폭력 피해 생존자 193명이 ‘2018분 이어말하기’를 통해 성폭력 경험을 말한 적이 있어요. 광장에서요. 그거야 말로 ‘성폭력’의 의미를 바꾸는 장이었다고 생각해요. 늘 숨어야 했던 피해자들이 앞장서서 얼굴을 공개하며 말을 했잖아요. 그 변화를 보면서 가슴이 벅차더라고요. 사회는 이런 움직임을 ‘미투’로 명명하면서 그 의미를 들여다보는 중인데 운동가로선 ‘지금이 아니면 어렵다’는 절박함이 아무래도 있죠.”
강간죄 개정은 결국 이런 사회적 변화를 반영해 성폭력에 대한 패러다임 그 자체를 바꾸는 일이다. 이 소장은 ‘비동의 간음죄’가 “국가 형벌권의 과도한 사생활 침해가 될 수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반박했다. “내가 원치 않는 성적 행동에 대해서, 그 순간에 폭행이나 협박을 수반하지 않았거나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고 해서 피해가 아닌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수많은 여성들이 성폭력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사회인데 무엇이 그 여성들의 일상을 침해하는지를 돌아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행 법은 “법이 규정한 협의의 성폭력이 아니면 괜찮아”라는 면죄부를 도리어 가해자에게 주고 있기 때문에 “피해자의 인권 침해를 법이 방기하고 있다”고도 짚었다.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의원들에게 계속 의견서를 보내며 강간죄 개정을 촉구하고 있다. 20대 마지막 정기국회에서도 형법 개정안을 심사하지 않으면, 운동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미투’ 운동이 확산되자 각종 법 개정안을 발의하며 시끄러웠던 국회는 언제 그렇냐는 듯 조용하다. 30년 가까운 시간을 반성폭력 운동을 하며 보내온 그다. 이 소장은 응답조차 하지 않는 국회에 안타까움을 표하면서도 활동가로서의 경험을 돌아보며 “사회의 변화는 결코 주저앉지 않고 언제든 불씨가 다시 살아나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변화된 인식이 법을 바꾸고, 법은 또다시 인식의 변화를 견인한다. “‘비동의 간음죄’가 규정되면 적어도 성관계를 할 때 상대의 적극적 합의를 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일상에서 실천이 될 수 있겠죠. 이미 사건이 터진 뒤에 처벌하는 것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규정 하나가 우리 사회와 문화를 얼마나 바꿀 수 있는지,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의 인권을 보장할 수 있는지 거시적인 안목으로 봤으면 해요.” 이 소장은 되물었다. “후대가 자유롭고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에서 살았으면 하는 바람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텐데 그걸 위해 지금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까요?”
박다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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