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맡은 윤정숙씨
한국여성민우회 공동대표로 일했던 윤정숙씨(48)가 지난 3일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로 자리를 옮겼다. 지난해 1월 민우회 일을 그만둔 지 꼭 1년만이다. 지난해 12월30일 서울 가회동 아름다운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개띠 해가 성큼 다가온 줄도 모른채 일하느라 바빴다. 그 역시 58년생 개띠다. “취임 두어달 전부터 미리 나와 업무를 파악하고 조직의 새로운 전망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17년 동안 ‘삶터’였던 여성단체에서 나눔운동을 하는 시민단체의 상임이사로 터전을 옮긴 까닭이 궁금했다.
“제안을 받고 6개월 동안 고민했습니다. 밥맛도 없고, 자다가 벌떡벌떡 일어날 정도로 고민했어요. 물론 말리는 이들도 있었지만 용기를 주는 이들도 많았어요.“
지난해 그는 친구를 만난 자리에 동석한 사람으로부터 우연히 신년사주를 들었다. ‘예언’은 세가지. 돈이 들어온다. 남자와 일한다. ‘양아치’가 되어야 한다. 비슷하다. 아름다운 재단에서 그가 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이 기금을 모으는 일이다. 때론 ‘가진 사람들’을 설득하고, 구스르고, 그들이 가진 사회적 자본이 더 쓰임새를 갖도록 두루 재분배해야 한다. 기업체의 임원 같은 남자들도 수없이 만나야 하니, 남자와 일하는 것도 맞다.
“제가 배운 성인지적 감수성이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곳에서 일하는 이들의 80%가 여성인 데다, 남성들도 여성성을 가진 사람이 많거든요.”
여성운동계 맏언니에서 나눔 전사로 변신한 이유
중학생·노동자·군인 만나는… 이 일이 큰 배움터이기 때문 여성운동계에서는 ‘2.5세대’로 인정받는 그다. 한명숙, 지은희, 이미경, 장하진, 이경숙, 정강자, 김상희, 이철순, 신혜수, 정현백씨가 2세대 여성운동가였다면, 그는 ‘낀세대’다. 선배들이 가진 선동적인 카리스마도, 후배들이 가진 당돌함도 없다. 남들처럼 일찍부터 사회운동에 뛰어들지도 않았다. 30살부터 17년 동안 여성운동판에서 일한 ‘늦깎이 운동가’였다. 노동운동가였던 남편 이목희 의원(열린우리당)의 뒷바라지만 하다 30살이 되기 직전 여성운동에 뛰어들곤 비로소 ‘밥맛’을 되찾았다. 남들보다 늦었다고 하지만 한번 물었다 하면 놓지 않는, 진도개 같은 근성이 그에게는 있다. 여성계에선 잘 알려진 얘기다. 몇년 동안 여성 임금차별, 결혼퇴직제 반대운동을 꾸준히 벌였고 서울대조교 성희롱 사건 대책을 내놓으며 여성계의 힘을 모았다.‘내 몸의 주인은 나’라는 캠페인, 평등명절 운동 등 생활 속에서 여성운동을 하자고 아이디어를 냈다. 반응도 좋았다. 38살엔 뒤늦게 영국 서섹스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2년 동안 본격적으로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처음으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살겠다”는 생각을 했다. 늘 자신보다 타인의 삶에 자신을 꿰맞추는 일이 중요했다.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았다.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이 이름난 국제조직에 자리를 잡을 때 그는 월급이 100만원도 되지 않는 시민단체로 돌아왔다. “생동감과 창의성은 책상에서 나오지 않아요. 대표로 일하면서 현장에서 멀어졌다는 위기감이 있었어요. 제 일정의 80%는 회의로 시간을 보내고, 몸에 맞지 않는 대표 연설을 해야 했고…. 현장성은 뭘까 하는 고민이 있었지요.” 재단의 상임이사를 맡기로 한 뒤 찾은 현장 특히 지역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는 “가슴이 설랬다”고 했다. 중학생, 일용직 노동자, 독도 수비대같이 ‘없는 사람들’이 콩 반쪽이라도 나눠먹는 것을 보고서였다. 윤 이사는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큰 일만 줄잡아 20개가 넘는다”고 했다. 그는 기부 문화를 사람들의 삶속에 뿌리내리도록 하고 싶다. “막연히 1%를 나누자는 것이 아니라, 왜 나눔이 즐거운 일인지, 왜 나누는 사람 자신이 먼저 즐거운지 알리겠다”고 한다. “없는 사람이 기부해요, 여기는. 노점상, 어린 학생, 오지에 근무하는 군인 등 온갖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요. 제도 안에 없는 사람들, 사회의 눈에서 벗어난 이들을 돕는 여기가 나에게 대단한 배움터예요. 이런 만남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어요.”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중학생·노동자·군인 만나는… 이 일이 큰 배움터이기 때문 여성운동계에서는 ‘2.5세대’로 인정받는 그다. 한명숙, 지은희, 이미경, 장하진, 이경숙, 정강자, 김상희, 이철순, 신혜수, 정현백씨가 2세대 여성운동가였다면, 그는 ‘낀세대’다. 선배들이 가진 선동적인 카리스마도, 후배들이 가진 당돌함도 없다. 남들처럼 일찍부터 사회운동에 뛰어들지도 않았다. 30살부터 17년 동안 여성운동판에서 일한 ‘늦깎이 운동가’였다. 노동운동가였던 남편 이목희 의원(열린우리당)의 뒷바라지만 하다 30살이 되기 직전 여성운동에 뛰어들곤 비로소 ‘밥맛’을 되찾았다. 남들보다 늦었다고 하지만 한번 물었다 하면 놓지 않는, 진도개 같은 근성이 그에게는 있다. 여성계에선 잘 알려진 얘기다. 몇년 동안 여성 임금차별, 결혼퇴직제 반대운동을 꾸준히 벌였고 서울대조교 성희롱 사건 대책을 내놓으며 여성계의 힘을 모았다.‘내 몸의 주인은 나’라는 캠페인, 평등명절 운동 등 생활 속에서 여성운동을 하자고 아이디어를 냈다. 반응도 좋았다. 38살엔 뒤늦게 영국 서섹스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2년 동안 본격적으로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처음으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살겠다”는 생각을 했다. 늘 자신보다 타인의 삶에 자신을 꿰맞추는 일이 중요했다.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았다.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이 이름난 국제조직에 자리를 잡을 때 그는 월급이 100만원도 되지 않는 시민단체로 돌아왔다. “생동감과 창의성은 책상에서 나오지 않아요. 대표로 일하면서 현장에서 멀어졌다는 위기감이 있었어요. 제 일정의 80%는 회의로 시간을 보내고, 몸에 맞지 않는 대표 연설을 해야 했고…. 현장성은 뭘까 하는 고민이 있었지요.” 재단의 상임이사를 맡기로 한 뒤 찾은 현장 특히 지역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는 “가슴이 설랬다”고 했다. 중학생, 일용직 노동자, 독도 수비대같이 ‘없는 사람들’이 콩 반쪽이라도 나눠먹는 것을 보고서였다. 윤 이사는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큰 일만 줄잡아 20개가 넘는다”고 했다. 그는 기부 문화를 사람들의 삶속에 뿌리내리도록 하고 싶다. “막연히 1%를 나누자는 것이 아니라, 왜 나눔이 즐거운 일인지, 왜 나누는 사람 자신이 먼저 즐거운지 알리겠다”고 한다. “없는 사람이 기부해요, 여기는. 노점상, 어린 학생, 오지에 근무하는 군인 등 온갖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요. 제도 안에 없는 사람들, 사회의 눈에서 벗어난 이들을 돕는 여기가 나에게 대단한 배움터예요. 이런 만남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어요.”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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