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여성

“만취한 여성 상대 성범죄 처벌해야”…‘준강간 공대위’ 출범

등록 2020-07-07 19:46수정 2020-07-07 20:36

서울고등법원, 만취 여성 끌고간 성범죄 가해자에 “고의 없다” 판결
현행 준강간 조항은 ‘피해자가 술에 취하거나 잠이 든 경우’ 제외
‘약물 성폭력’ 등은 처벌 사각지대 놓여…‘동의 여부’ 개정 필요
7일 ‘준강간사건의 정의로운 판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천주교성폭력상담소 제공
7일 ‘준강간사건의 정의로운 판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천주교성폭력상담소 제공

ㄱ씨는 2017년 5월5일 친구들과 클럽에서 놀다가 가해자와 합석해 술을 마신 뒤 모든 기억을 잃었다. 깨어났을 땐 이미 성폭력이 발생한 뒤였다. ㄱ씨는 이내 다시 정신을 잃었고, 성폭력이 또다시 발생했다. ㄱ씨는 고민 끝에 경찰에 신고했고, 시시티브이(CCTV)를 통해 4명의 남성이 정신을 잃고 혼자 서지도, 걷지도 못하는 그를 끌고 서울 외곽의 모텔로 데려간 것을 확인했다. 모텔 직원은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짐짝’처럼 끌려가는 ㄱ씨의 상황을 보면서도 방을 내어줬다. ㄱ씨는 어렵사리 신고를 결심했지만, 그에게 가장 먼저 돌아온 경찰의 답은 “클럽에서 일어난 일이 사건이 되겠냐”는 말이었다. 서울고등법원 제9형사부는 지난 5월7일 “피해자의 항거불능 상태임은 분명하나 그것이 피고인이 만취 상태를 이용하여 강간을 하였다는 고의를 증명하기 어렵다”며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 사건은 현재 대법원 상고심 판결을 앞두고 있다.

천주교성폭력상담소 등 163개 단체는 7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준강간사건의 정의로운 판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출범을 알리며 ㄱ씨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정의롭고 상식적인 판결”을 촉구했다. 이들은 “피해자가 만취해 어떠한 권리도 행사할 수 없었던 상황을 편견 없이 면밀히 검토하길 바란다”며 “만취 상태를 이용해 범죄를 저지르고, 그 범죄가 이뤄지도록 조력한 모든 사람을 엄중히 조사하고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현행 법은 ‘준강간’ 범죄를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한 성폭력’으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준강간 관련 판례를 살펴보면, 정신장애가 아닌 ‘술에 일시적으로 취하거나 잠이 든 경우’를 ‘심신상실’로 판단하지 않는다. 이때문에 ‘버닝썬 사건’처럼, 마약을 물이나 술에 타 정신을 잃게 하는 이른바 ‘약물 성폭력’과 같은 성범죄 피해자는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다. ‘항거불능’이란 요건도 ‘폭행 또는 협박이 현저히 곤란한 경우’처럼 극히 제한적으로만 해석한다. 이런 이유로, 강간죄와 함께 준강간 역시 당사자의 ‘동의 여부’를 성폭력으로 판단하는 기준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정은자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공동대표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준강간의 경우) 술 혹은 약물에 만취한 피해자는 피해 경험을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는 상태기 때문에 성폭력의 책임을 고스란히 뒤집어쓰거나 성폭력 피해 자체를 부정당하고 오히려 역고소에 시달린다”며 “이번 사건의 1, 2심은 ‘술 취한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처벌되지 않는다’는 잘못된 인식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조은희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상담소의 상담통계(2018년 기준)를 보면 술과 약물을 매개로 한 성폭력 상담이 전체의 17.6%를 차지할 만큼 많이 일어나는데도 사법부는 가해자들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다”며 “항거불능 상태의 피해자를 남자 여럿이 모텔로 데려간 것부터 가해자의 고의성이 보이는 것”이라고 짚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저는 성실히 일을 하고, 가끔은 술도 마시고, 친구들과 일상을 즐기던 대한민국의 평범한 여성”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ㄱ씨는 “제 사건은 남성들의 잘못된 문화를 보여주고 흔히 일어나는 사건이라 여러 단체가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와 같은 피해자가 더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무섭지만 용기를 내기로 했다”며 연대와 지지를 호소했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혐오와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해
지금, 한겨레가 필요합니다.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