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만의 선언: 낙태죄 폐지 전국 대학생 공동행동’ 회원들이 지난 7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역에서 ‘낙태죄 마침표’ 집회를 열어 정부의 “주수 제한 입법예고안의 완전 철회와 낙태죄의 완전 폐지”를 촉구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 한달 하고도 보름이 남았다. 지난해 4월 헌법재판소는 인공 임신중절을 처벌하는 형법 제269조 1항과 제270조 1항을 헌법불합치로 결정하면서, 오는 12월31일까지 새 법을 입법하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두달을 채 남기지 않고 지난달 7일 입법예고한 정부의 개정안은 임신 주수와 사유에 따라 임신중지를 여전히 범죄로 규정했다. 정부의 개정안을 비판하는 현장 목소리를 들어봤다.
“저는 이제 막 60대에 들어선 오랜 천주교 신자입니다. 성당에서 오랜 기간 봉사자로 일하면서 낙태를 경험한 수많은 50대에서 70대 여성을 만나왔습니다. (임신중지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음에도, 길게는 50년 전 경험으로 끊임없이 고해성사를 하는 고통받는 여성들을 보며 이런 단죄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리고 이 단죄는 왜 여성들만을 향한 것인가 깊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크리스티나)
“국가는 시대에 따라 언제나 다른 출산율 조절 정책을 써왔습니다.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애쓰고 있는 국가는 불과 30~40년 전만 해도 한명만 낳으라고 권고하다 못해 낙태버스마저 운영했습니다. 여성의 몸이 국가에 의해 멋대로 조정될 수 있는 물체입니까. 필요에 따라 낙태를 권장하고, 그렇지 않으면 반대하게요. 적어도 사회안전망과 지원정책, 아이 아버지에게도 같은 짐을 지게 하는 법률이 생기지 않는 한 낙태죄는 여성차별적일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저는 낙태죄 폐지를 찬성합니다.”(안젤라)
지난달 14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낙태죄 전면 폐지를 촉구하는 천주교 신자 기자회견’에서 낭독된 의견들이다. 2주간 1015명의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들이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모낙폐)에 지지 서명과 의견을 보내왔고, 이들의 목소리를 6명의 대독자가 읽었다.
지난해 4월 사법부가 형법 27장 ‘낙태의 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했을 때, 시민사회는 66년 전 만들어진 ‘낙태죄’가 드디어 폐지된다며 뜨겁게 환영했다. 하지만 1년7개월이 지난 지금 오히려 논란만 더욱 커지고 있다. 정부가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대한 후속 조처로 지난달 7일 형법·모자보건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는데, 낙태를 죄로 규정한 조항을 남겨둔 채 ‘허용 조항’을 마련하는 수준에 그쳤기 때문이다. 정부의 안은 임신한 여성의 의사만으로 임신중지가 가능한 기간을 임신 14주까지로 제한했고, 임신 15~24주엔 사회경제적 사유가 있을 때 상담 절차를 거쳐 가능하도록 정했다. 하지만 여성단체 등 시민사회는 “명확하지 않은 임신 주수와 사유에 따라 예외만 허용한 뒤 여전히 임신중지를 형법으로 범죄화하고 있다”며 거세게 비판하고 있다.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해 헌법에 합치되지 아니한다”는 헌법재판소의 판단보다 후퇴한 개정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시민사회가 오랜 기간 염원한 임신중지 비범죄화, ‘낙태죄’ 폐지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을까. 오는 16일 정부의 입법예고 기간은 끝난다. 헌법재판소가 새 입법을 요구한 올해 12월31일까지는 불과 한달 반밖에 남지 않았다.
지난 7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역 앞에서 열린 ‘낙태죄 마침표’ 집회에서 ‘160만의 선언 낙태죄폐지전국대학생공동행동’ 회원들이 정부의 “주수 제한 입법예고안의 완전 철회와 낙태죄의 완전 폐지”를 촉구하는 행위극을 펼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지난 7일, 서울 영등포역 5번 출구 앞. ‘법무부’와 ‘보건복지부’ 이름표를 찬 3명의 대학생이 “여성계 반발 완화하라”라고 쓰인 팻말을 들자, 옆에 있던 스피커에선 “왈왈왈” 개 짖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전국 20곳의 대학생 여성주의 동아리가 모인 ‘낙태죄 마침표 집회’의 행위극이었다. 위험한 낙태를 뜻하는 철사 옷걸이를 몸에 두른 곰인형 수십개엔 낙태죄 폐지를 지지하는 시민들의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160만의 선언: 낙태죄 폐지 전국 대학생 공동행동’이 꾸린 이 집회에서 20대 여성들은 “낙태죄 개정 말고 완전히 폐지하라”고 외쳤다. 160만은 한국 여성 20~24살 인구수다.
지난해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임신중지 완전 비범죄화를 기대했던 시민들은 크게 반발하고 있다. 10만명 이상의 국민 동의를 받아 지난 3일 국회에 제출된 ‘낙태죄 전면 폐지와 여성의 재생산권 보장에 관한 청원’이 곧 국회 심의를 받을 예정이다. 이 청원은 △‘낙태죄’ 전면 폐지 △‘낙태’ 아닌 ‘임신중단’ 또는 ‘임신중지’로 용어 교체 △임신중지 유도약의 빠른 도입 등이 담겼다.
정부안이 미흡한 수준으로 입법예고되자, 그 대안으로 3명의 국회의원이 3가지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다.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달 12일 발의한 형법과 모자보건법 개정안은 임신 주수와 사유에 관계없이 임신부의 의사로 임신중지를 할 수 있는 낙태죄 완전 폐지의 내용을 담았다. 애초 낙태가 허용되는 임신 주수를 정부 법안 14주보다 늘리는 24주안을 발의한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주수 제한을 없애는 방향으로 법안을 수정 중이다. 지난 5일 정의당 당론으로 나온 이은주 의원의 법안은 형법과 모자보건법뿐만 아니라 근로기준법까지 개정하는 내용이 담겼다. 3가지 안 모두 임신 주수에 따른 제한을 없애는 방향이다.
“그렇게 쉬지는 못했어요. 제가 계속 일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서. … 그때 초기라서 알릴 상황도 아니었고. … 만약에 그것 때문에 쉬려면 회사에다 정확하게 이야기를 해야 되잖아요. 그게 쉽지 않아서 그냥 연가를 조금 사용을 했고 그렇게 푹 쉬지는 못했어요.”(ㄱ씨, 36살 기혼)
지난해 2월 발표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에 사례자로 참여한 한 여성의 이야기다. 15~44살 여성 1만명이 참여한 온라인 조사에서 임신중지 이후 ‘적절한 휴식을 취했다’는 응답자는 전체의 47.7%로 절반에 못 미쳤다. ‘적절한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는 44.8%, ‘전혀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는 답은 7.5%였다. 보고서는 “임신중지를 경험한 여성들의 상당수가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한 것이 사례자들 사이에 동일하게 언급되고 있다. 주변에 임신중지 사실을 알리고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60만의 선언 낙태죄폐지전국대학생공동행동’ 회원들이 지난 7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역에서 연 ‘낙태죄 마침표’ 집회에 코로나로 참석하지 못한 시민들이 보낸 인형들이 놓여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현행 근로기준법 74조 ‘임산부의 보호’ 조항에는 “사용자는 임신 중인 여성이 유산 또는 사산한 경우 그 근로자가 청구하면 유산·사산 휴가를 주어야 한다”고 돼 있지만 “다만, 인공 임신중절 수술에 따른 유산의 경우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는 예외를 명시하고 있다. 지난 5일 나온 이은주 정의당 의원의 안은 형법과 모자보건법에서 낙태죄를 삭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임신중절 수술의 경우 유산 휴가를 갈 수 없도록 한 근로기준법까지 고쳤다. 또한 ‘모자보건법’의 법명을 ‘임신·출산 등과 양육에 관한 권리보장 및 지원법’으로 바꿨다. ‘건전한 자녀의 출산과 양육을 도모’한다는 이 법의 목적 규정도 “모든 사람이 인간의 존엄을 바탕으로 임신·출산·양육 전 과정에서 권리를 보장받는다”는 내용으로 바꿨다.
지금 여성계는 ‘낙태죄’ 폐지는 물론 ‘재생산권’과 ‘건강권’을 법에 담아야 할 때라고 말한다. 재생산권이란 여성 자신이 임신·출산·임신중지 등 재생산 여부를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통제할 권리를 말한다. 낳을 권리와 낳지 않을 권리, 키울 권리를 모두 옹호하고 누구나 이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법과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낙폐는 10일 논평을 내어 “이은주 의원안은 (낙태죄) 처벌 금지를 넘어 (임신·출산·양육의) 권리 보장을 명확히 제시한 개정안”이라며 “국회는 처벌이 아닌 권리 보장에 방향을 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료·보건 시민사회에서는 ‘낙태죄’ 찬반에 대한 단순 논쟁을 넘어서자고 강조한다. 자신이 원하는 시기에 임신과 출산을 경험하고 의료서비스를 제약이나 차별 없이 이용할 수 있는 국가적 환경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김새롬 시민건강연구소 젠더와건강연구센터장은 “임신중지에 대한 보장을 비롯해 재생산 권리 보장 수준은 한 사회에서 여성의 자유권과 사회권, 특히 건강권 수준을 나타내는 대리지표”라고 말했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