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전 서울 중구 명동의 한 호텔에서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 피해자와 함께 말하기' 기자회견이 열렸다. 사진공동취재단
“아직까지 피해사실에 관한 의문을 제기하는 분들께서 이제는 소모적 논쟁을 중단해주실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지난해 7월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의혹 사건’ 고발 뒤 처음으로
공식석상에 나와 직접 목소리를 낸 피해자는 소모적 논쟁을 멈춰달라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 박 전 시장 지지자들은 “피해자의 주장이 구체적인 증거나 검증 없이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취지의 주장을 펴고 있다.
박 전 시장이 부재하는 근본적 한계에도 피해사실은 조금씩 실체를 드러냈다. 검찰은 피소 사실 유출 의혹 수사로 박 전 시장이 “이번 파고는 넘기 힘들 것 같다”는 문자메시지를 남겼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서울시장 비서실 성폭행 사건’ 재판과정에서는 피해자가 고소 두 달 전 상담치료 과정에서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사실을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정신적 고통을 토로한 사실이 드러났다.
무엇보다 지난 1월 발표된 국가인권위원회 직권조사 결과는 국가기관이 다각적인 조사를 거쳐 피해사실을 공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인권위는 5개월에 걸쳐 51명의 서울시 전·현직 직원 및 지인에 대한 참고인 조사를 진행했다. 피해자 휴대전화를 디지털 포렌식(분석)했고, 서울시·경찰·검찰·청와대 등이 제출한 자료를 검토했다.
인권위 결론은 “박 전 시장이 성희롱에 해당하는 성적 언동을 했다”는 것이었다.
최영애 국가인권위원장과 상임위원들이 25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린 전원위원회를 진행하고 있다. 이날 인권위는 전 서울시장 성희롱 등 직권조사 결과 보고를 의결 안건으로 상정해 논의했다. 연합뉴스
18일 <한겨레>가 입수한 59쪽 분량의 인권위 직권조사 결정문을 토대로 인권위가 ‘성희롱이 있었다’고 판단한 근거와 이유를 따져봤다. 결정문에 담긴 참고인들의 진술을 최대한 왜곡 없이 옮겨 담았다.
2년에 걸쳐 지속해서 피해사실 호소…확인한 것만 14차례
인권위는 직권조사 과정에서 피해자가 2년여에 걸쳐 주변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박 전 시장이 밤늦게 텔레그램을 보낸다’거나 ‘박 전 시장이 신체접촉을 했다’는 등의 말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런 사례는 2018년 초부터 2020년 5월까지 인권위가 확인한 것만 14차례다.
인권위 결정문에 담긴 참고인 진술을 살펴보면, 피해자가 복수의 참고인들에게 박 전 시장의 부적절한 행동을 완곡하지만 꾸준하게 알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2018년 초, 참고인 ㄱ씨는 피해자로부터 “사장님이 밤에 연락하고 가끔 보고하러 들어가면 네일아트 한 손톱을 만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ㄱ씨는 박 시장이 보낸 ‘런닝 입은 상반신 사진’도 직접 확인했다.
2018년 4월, 피해자는 참고인 ㄴ씨에게 “제3자가 봤을 때 조금 우려되는 게 있다”며 텔레그램 메시지를 사진을 보여줬다. ㄴ씨는 박 시장이 밤에 보낸 텔레그램 메시지와 함께 ‘런닝 입은 셀카’ 사진을 보았다.
2018년 10월, 참고인 ㄷ씨는 피해자로부터 “(박 시장이) 오늘 비밀채팅 거셨더라고요ㅜㅜㅋㅋㅋㅋ 이상하긴 하지만...”이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2019년 여름∼가을 무렵, 피해자의 친구 ㄹ씨는 피해자가 박 시장과 주고받은 텔레그램 대화내용을 봤다. 박 시장이 밤 9시가 넘은 시간에 피해자에게 ‘너네 집에 갈까’, ‘혼자 있냐’고 보낸 메시지였다.
2020년 1∼3월, 참고인 ㅁ씨는 피해자로부터 “박 시장이 서재에서 스킨쉽을 시도했고 손을 잡아달라고 뒤에서 내밀었다”는 말을 들었다. 같은해 2월6일께, 참고인 ㅂ씨는 피해자로부터 “시장님이 저를 여자로 보는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이외에도 피해자의 지인은 2020년 1∼3월 박 시장이 ‘너랑 일할 때가 좋았다, 우린 특별한 사이잖아’라고 보낸 텔레그램 메시지를 보았고, 또 다른 참고인은 그해 5월 소송을 준비하던 피해자가 “오침 시간에 깨우러 갔을 때 안아달라고 해서 거부했는데도 안아달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서울시청 비서관·비서 4명은 공통으로 피해자로부터 ‘박 시장이 밤에 문자메시지를 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메시지를 직접 보지는 못했다고 진술했다.
피해자 휴대전화 포렌식으로 텔레그램 일부 복구…비밀채팅방 초대도 확인
인권위는 디지털 포렌식을 통해 복구한 피해자의 휴대전화를 통해 박 전 시장과 피해자 사이에 오간 텔레그램 메시지 일부도 직접 확인했다. 또 실제로 박 전 시장이 피해자를 비밀채팅방에 초대한 사실도 확인했다.
2018년 2월15일 밤 11시59분, 박 시장은 피해자에게 “우리 (피해자 이름)이 안 데려 가는 남자가 있다니 이해가 안가, 세계 최고의 신붓감인데요”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2019년 5월22일, 박 시장은 피해자에게 텔레그램으로 “(피해자 이름)이 신랑 빨리 만들어야지”, “지금 방에 있어”, “늘 내 옆에서 알았지?”라는 등의 텔레그램을 보냈다.
날짜가 불분명한 시점, 박 시장은 피해자에게 “꿈에서는 마음대로ㅋㅋㅋ”, “그러나 저러나 빨리 시집가야지, 내가 아빠 같다”는 등의 메시지를 보냈다.
인권위는 피해자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박 전 시장이 사망해 방어권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사실인정 여부를 보다 엄격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내실에서 박 시장이 안아달라고 했다는 피해자의 주장은 “그 주장을 상당히 신뢰할 만 하나, 행위 발생 당시 피해상황을 들은 참고인이 없다”는 이유로 인정된 피해사실에서 빠졌다. 박 시장이 성관계 방법을 설명하는 텔레그램을 보냈다는 주장 역시 “피해자가 이를 받았을 당시 보거나 들은 참고인이 없고, 이 내용이 디지털 포렌식으로 복구되지 않아 대화 내용을 확인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제외했다. 일각의 주장처럼 피해자의 주장이 ‘검증 없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인권위의 결정문에 따르면 사실이 아닌 셈이다.
17일 오전 서울 중구 명동의 한 호텔에서 열린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 피해자와 함께 말하기' 기자회견 안내판. 사진 한국여성의전화 페이스북
“인정된 성적 언동은 부하직원 성적 대상화…성희롱에 해당”
여러 참고인 진술, 텔레그램 메시지 등을 바탕으로 인권위는 △박 전 시장이 밤늦은 시간 부적절한 메시지·사진·이모티콘 전송했다는 주장 △집무실에서 네일아트한 손과 손톱을 만지는 등 부적절한 신체접촉이 있었다는 주장을 “사실로 인정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인권위는 “성희롱 인정 여부는 성적 언동의 수위나 빈도가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의 업무 관련성 및 성적 언동이 있었는지 여부, 고용환경의 악화 등이 관건”고 강조했다. 따라서 “위에서 인정한 성적 언동은 업무상 관계에 있는 부하직원을 성적 대상화한 것으로 피해자와 같은 처지에 있는 합리적인 피해자의 입장에서 성적 굴욕감과 혐오감을 느낄 수 있는 행위에 해당한다”는 게 인권위의 결론이다.
피해자는 인권위 조사 결과에 대해 17일 기자회견에서 “저는 최선을 다하여 조사에 임했고, 일부 참고인들의 진술 등 정황에 비추어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받았다. 사실에 관한 소모적인 논쟁이 아닌 진정성 있는 반성과 용서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사회를 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고 했다.
임재우 기자
ababd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