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게 살다가 스스로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때, 그게 저에게는 씻는 시간이었어요. 잠시 멈춤 버튼을 누를 수 있는 시간, 비누가 녹아 모양이 바뀌는 것을 보면서 짧지만 아무 생각 없이 보낼 수 있는 그런 시간이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한아조’ 조한아 대표가 말했다.
코로나19로 집에 머무는 시간은 늘어났지만, 오히려 ‘쉼’이라는 집 본연의 기능은 사라졌다. 재택근무가 일상이 되면서 집은 사무실이 되고, 육아의 현장이 되고, 실내 체육시설이 됐다. 층층이 쌓였다는 의미에서 ‘레이어드 홈’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그러다 보니 잠들기 전이면 늘 이런 기분이 든다. “아, 좀 쉬고 싶어!”
신세계인터내셔날 자주, 한아조,무중력스튜디오, 라부르켓, 산타 마리아 노벨라, 동구밭의 비누들. 윤동길(스튜디오어댑터 실장)
집 밖에 나가지 않고도 지치는 시절, 휴식이 필요한 때다. 조 대표는 그 휴식의 도구로 비누를 주목한 것. 고체 비누는 그동안 플라스틱 쓰레기를 덜 배출한다는 이유로 환경을 걱정하는 이들이 주로 써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가치 소비를 지향하는 엠제트(MZ)세대를 필두로 비누 소비가 퍼져 나가고 있는 상황. ‘W컨셉’, ‘무신사’ 등 엠제트세대가 즐겨 찾는 온라인 쇼핑몰에는 수백 가지의 고체 비누가 검색된다.
지난 6월 고체 비누 ‘자주 제로바’를 출시한 신세계인터내셔날은 출시 한달 만에 5개월치 판매 예정 물량을 완판했다. 신세계인터내셔날 관계자는 “구매 고객의 80%가 20~30대인데 이들을 중심으로 고체 비누 시장이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속가능 라이프스타일 웹진 〈선택지〉에서 진행하는 ‘비누전’. 신소윤 기자
고체 비누 시장을 이끄는 ‘큰손’은 환경 문제에 민감한 이들이다. 친환경을 내세운 비누 전시회까지 열릴 정도. 25일까지 지속가능 라이프스타일 웹진 <선택지>가 진행하는 ‘비누전’은 환경의 맥락에서 비누를 선택하는 이들이 주목해야 할 전시다. 지난 14일 직접 찾은 서울 강동구 성내동 전시장엔 얼굴과 몸을 씻는 클렌징비누부터 샴푸바와 린스바, 설거지바, 반려동물을 위한 비누까지 총 11개 브랜드 70여종의 비누가 빼곡했다. ‘동구밭’ ‘아로마티카’ ‘톤28’ 등 구매가 쉬운 것부터 비건 지향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트망트망’, 작은 마을 공동체에서 만들었지만 마니아층을 보유한 ‘스페이스선’ 등 브랜드 구성도 다양했다.
전시를 기획한 임소형 ‘내일만사’ 협동조합 대표는 “제로웨이스트 실천하고자 할 때 비누만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물건이 없다”며 기획 의도를 밝혔다. 전시품으로 선정된 비누들은 비닐 포장이 없고, 팜유 등 자연을 훼손하며 생산되는 재료를 사용하지 않는 제품들이다. 일상에서 비누 사용을 적극적으로 권하는 임 대표는 머뭇거리는 이들의 귀에 쏙 꽂힐 만한 제안을 했다. “다 쓴 샴푸통 분리배출 할 때 아무리 물에 헹궈도 거품 계속 나와서 짜증 났던 기억 다들 있잖아요. 그 귀찮음이 사라지는 것만 해도 어디예요?”
신세계인터내셔날 고체 비누 자주 제로바. 윤동길(스튜디오어댑터 실장)
인기의 원인을 체험해보기 위해 비누를 직접 써보기로 했다. 한아조에서 구매한 ‘퍼그램’(per gram)은 말 그대로 100~500g까지 원하는 무게의 비누 여러 조각을 담은 제품이다. 공예품처럼 예쁜 이 브랜드의 비누들은 아름다운 대신 딜레마가 있다. 매끄럽게 다듬으며 생기는 조각 비누들 말이다. 처음에는 이런 자투리 비누를 업체 대표의 가족과 지인들이 나눠 썼지만, 생산량이 많아지며 이내 감당하기 어려워졌다고 한다. 대표는 모양은 다르지만 사용하는 데 문제가 없는 비누들을 퍼그램이란 이름으로 저렴한 가격에 팔기로 했다. 수익금 일부는 환경단체에 기부된다.
종이로 겹겹이 싸인 택배 포장을 풀자 다양한 모양의 비누가 눈에 들어왔다. 비누 조각들은 쓸모없는 자투리라기보다는 원통 기둥, 꽃 모양, 비정형의 육면체 등 다양한 상상이 가능한 조각처럼 보였다. 재밌는 색감과 모양 덕분에 후딱 씻고 나오기 급급했던 샤워 시간에 리듬감이 생겼다.
직접 만들어본 무중력스튜디오의 샴푸바. 윤동길(스튜디오어댑터 실장)
또 다른 택배 상자를 열었다. 이번엔 비누 공방 ‘무중력스튜디오’에서 주문한 샴푸바 제작 키트. 상자 속에는 가루와 액체 재료, 작은 약통 몇개와 비닐팩, 종이봉투 등이 들어 있었다. 만드는 법은 재료를 모두 섞은 뒤 손으로 조물거려 모양을 만들면 끝이다. 제품 구매 때 읽은 설명서에서 본 “다른 건 다 챙겨드릴게요. 10분만 준비해주세요”라고 쓰인 글귀 그대로였다. 어릴 적 지점토를 만지듯 조물거리며 만들다 보니 10분이 금세 지나 아쉬울 정도였다.
이틀간 건조를 마친 뒤 샴푸바를 써봤다. 처음에는 감고 나서 비누에 머리카락이 엉겨 붙어 지저분해지지 않을까, 머리가 뻣뻣해지진 않을까 걱정이 됐다. 괜한 걱정이었다. 키트에 딸려온 비누망에 비누를 넣어 사용하니 머리카락이 비누에 붙을 일이 없었다. 머리카락이 물에 젖었을 때는 평소보다 뻣뻣했지만 말린 뒤에는 평소보다 매끄러운 느낌이었다.
무중력스튜디오의 비건 비누. 무중력스튜디오 제공
무중력스튜디오에서 만드는 비누들은 모두 팜유와 동물성 재료를 쓰지 않는다. 기름야자나무에서 추출하는 팜유는 비누, 샴푸, 과자 등을 생산할 때 흔히 사용하는 재료지만, 생산 과정에서 열대우림 파괴 등의 논란이 있다. 지난달 28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무중력스튜디오 작업실에서 만난 조유진 대표는 “비누 공방을 운영하다 보니 용기를 직접 가져와 물건을 담아 가거나 종이 포장마저 안 쓰려고 하는 고객들에게서 많이 배운다”고 말했다.
이튿날엔 취재차 구매한 비누 브랜드 ‘동구밭’의 고체 트리트먼트바도 함께 사용해봤다. 모질이나 피부에 따라 사용감이 제각각이라지만, 유레카! 얼렁뚱땅 한번에 잘 맞는 제품을 찾은 것 같았다. 손가락으로 쓸어내릴 때 푸석하게 걸리던 머리카락이 제법 부드러워졌다. 샴푸를 할 때 쫀쫀하게 일어나는 거품과 개운하게 씻겨 내려가는 점도 맘에 들었다. 소소하지만 직접 만든 무언가로 얻은 새로운 경험, 무기력한 일상 가운데 이런 게 휴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라브루켓의 비누. 윤동길(스튜디오어댑터 실장)
고체 비누 시장이 커지며 고급 비누도 덩달아 인기다. 소수를 위한 프리미엄 향수를 뜻하는 ‘니치 향수’의 대표 브랜드인 산타 마리아 노벨라, 조말론, 딥티크 등에서 출시한 비누들은 개당 가격이 2만~4만원대에 이르지만 해마다 ‘스몰 럭셔리’ 열풍과 함께 인기가 치솟고 있다. 신세계인터내셔날에 따르면 올해 1~6월과 지난해 같은 기간 매출을 비교해볼 때, 산타 마리아 노벨라는 61%가 늘고, 라브루켓은 40% 증가했다고 한다.
지난 2주간 다양한 비누를 쓰고 경험하면서 “호텔 욕실을 꾸미려거든 다른 데 돈 쓰지 말고 비누를 사서 써보라”는 어느 누리꾼의 말이 떠올랐다. 비누를 쓰면 자연스레 들쭉날쭉한 플라스틱 통들이 정리되고, 깔끔한 욕실로 꾸밀 수 있다는 뜻이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천천히 몸을 씻는 시간, 집안 욕실에서 나만의 호캉스를 누려보자. 작은 비누 한 장은 의외로 많은 것을 안겨줄 수 있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