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 같은 길이 매혹적인 카마궤이의 골목 풍경. 노동효 제공
유년 시절 십자말풀이보다 미로찾기를 더 좋아했다. 어지러운 길을 헤매다 출구로 빠져나왔을 땐 이카로스처럼 날아오르고 싶었다. 아무리 복잡한 미로라도 출구를 찾지 못한 적은 없었다. 내가 미로의 ‘안’이 아니라 ‘바깥’에 있었기 때문이다. 인쇄된 미로찾기에서 선은 벽, 선과 선 사이는 길, 새처럼 내려다보며 출구를 찾을 수 있었다. 벽 너머를 볼 수 없는 3차원의 미로였다면 어땠을까?
미로를 배경이나 소재로 다루는 영화는 로맨스가 아니라 주로 스릴러나 공포물이다. 거대한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깨어난 청춘들이 미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메이즈 러너>, 집을 구하러 간 신혼부부가 똑같은 집들이 늘어선 주택단지에서 빠져나오려다 일생을 보내는 <비바리움>, 미쳐버린 아버지로부터 어머니와 아이가 미로로 도망치는 <샤이닝>. 미로는 주인공이 탈출해야 할 공간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황홀해서 탈출하고 싶지 않은 미로도 있다. 쿠바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 카마궤이가 그런 곳이었다.
15세기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남아메리카를 침략했고 남미의 광산에서 막대한 은을 캐 본국으로 보냈다. 두 나라는 식민지에서 벌어들인 재화로 더 부강해졌고, 위협을 느낀 유럽 각국은 자국의 해적들에게 사략 허가증을 주고 본토로 귀환하는 선박을 약탈하게 했다. <캐리비안의 해적>은 그 시절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갖은 보화를 실은 배들은 카리브 연안에서 물과 식량을 채워 대서양을 향해 출발했고 번성한 마을도 생겼다. 이런 마을을 해적들이 그냥 뒀을 리 있겠는가? 그들은 선박뿐 아니라 도시를 약탈하기에 이르렀고 산타마리아델푸에르토도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견디다 못한 사람들은 해변을 버리고 내륙으로 들어가 새 도시를 세웠다. 그리고 그 땅에 살던 추장 이름을 따 도시명을 지었다. 카마궤이.
카마궤이의 골목들은 구불구불하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 아니었다. 원래의 도시는 영국 출신 해적 모건(말년에 그는 영국령 자메이카 부지사로 임명되었으며 그의 이름을 딴 럼주 ‘캡틴 모건’이 지금도 팔린다)의 공격으로 불에 타 사라지고 말았다. 그 후 사람들은 침입한 해적이 길을 잃도록 꺾이고 휘면서 끝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미로형 도시를 지었다고 한다. 다른 편에선 해적에 대비한 미로형 도시는 호사가들이 꾸며낸 허구라고 말한다. 성당에 가까이 살려는 주민들이 마구잡이식으로 집을 짓다 보니 미로처럼 됐다고. 모두 카마궤이 주민의 말이니 어느 주장이 옳은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어떤 연유로 형성되었건 카마궤이의 미로 같은 길들이 매혹적이란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카마궤이 도착 직후부터 길을 헤맸다. 물론 길을 잃어도 좋았다. 무얼 꼭 보려고 간 것도 아니고, 어딜 꼭 가려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숙소에서 나와 도보로 10분, 첫번째 광장에 이르자 길이 갈라졌다. ‘갈래’라고 부르는 게 딱 어울릴 길이었다. 오른쪽으로 접어들었다. ‘찰리 채플린’의 사진과 ‘카사블랑카’ 술집이 있는 시네마 거리, 어느 가게 앞을 지나치다가 무심코 안을 들여다보았다.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강렬한 그림들이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미술관이라면 이미 문을 닫았을 시간, 아쉬움에 자릴 뜨지 못하고 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그때 안에서 한 사내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손짓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빼곡한 그림들 사이에 앉은 네 사람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손짓했던 사내가 말했다. “여긴 오픈 스튜디오야. 2층에 올라가도 되고 맘껏 구경해.”
쿠바 출신의 화가이자 도예가인 오스카르 로드리게스 라세리아의 작품. 노동효 제공
움직이는 미술작품 같은 자전거 택시. 노동효 제공
사내가 계단을 가리켰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는 쿠바 출신의 유명 화가이자 도예가 오스카르 로드리게스 라세리아였다. 2층으로 올라갔다. 벽면에 걸려 있는 그림과 세워둔 이젤, 붓, 나이프, 물감들. 내가 작품과 작업실을 구경하는 동안 2층으로 올라오는 이는 없었다. 그들은 손님을 의심하지 않은 채 계속 담소를 나눌 뿐이었다. 제법 긴 시간을 보낸 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1층은 오스카르의 작품을 전시하고 파는 갤러리였다. 작품들은 강렬했고, 다시 거리로 나섰을 땐 마치 ‘황홀한 미로’를 헤매다가 나온 기분이었다.
체 게바라 초상화가 있는 건물을 지나 숙소로 돌아오던 길, 동쪽으로 난 샛길을 보니 보름달이 떴다. 낮은 지붕들 사이 골목 끝에서 은화 같은 달이 반짝였다. 나는 밤이 깊은 줄도 모른 채 인적 끊길 때까지 달빛 쏟아지는 미로를 황홀감에 휩싸인 채 쏘다녔다. 색색으로 칠한 집과 담벼락, 달을 향해 달려가는 듯한 자전거. <밤의 미로 속으로>라는 영화를 촬영하는 세트장이나 초현실주의자의 꿈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밤이 지나고 해가 떴다. 어둠 때문에 도시가 미로처럼 느껴졌던 걸까, 의심했지만 아니었다. 태양 아래서도 카마궤이는 여전히 미로였다. 구부러진 길과 불규칙한 크기의 집과 광장들, 마음 가는 대로 발길을 옮겼고 느닷없이 광장이 나타나면 벤치에 앉아 쉬었다. 카르멘 광장엔 쿠바에서 유명한 조각가인 마르타 히메네스의 작품이 놓여 있었다. 담소를 나누거나 신문을 보는 쿠바인의 일상을 묘사한 조각품들이었다. 촬영을 하려는데 한 노인이 다가오더니 자신이 모델이라며 자랑했다. “정말인가요?” 눈을 동그랗게 뜨자 노인이 손에 쥔 신문을 펼치며 자세를 잡았다, 조각과 똑같은 모습으로.
길거리 작품과 벽화도 아름답지만 카마궤이를 예술의 도시로 변모시키는 건 무엇보다 자전거 택시에 그려진 그림들이었다. 인도의 바라나시, 네팔의 카트만두, 캄보디아의 시엠레아프(시엠립) 등지에서 다양한 인력거와 자전거 택시를 봤지만 카마궤이의 자전거 택시만큼 강렬하진 않았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올드타운을 오가는 자전거 택시는 그 자체로 움직이는 미술작품이었다. 차양막에 그려놓은 작품들이 도시를 미술관으로 만들었다.
자신을 모델로 만든 조각상 옆에서 포즈를 취하는 카마궤이의 한 시민. 노동효 제공
산토크리스토델부엔비아헤 성당에서 비가 그치길 기다리는 사람들. 노동효 제공
종일 걸었다. 걷고 또 걷고, 그러다 문득 미로 같은 골목들이 인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빈부귀천 가릴 것 없이 탄생부터 죽음까지 직선으로 이어지는 인생은 없다. 아무리 철저히 생을 계획한들 어디선가 길은 굽어져 우리를 전혀 예상치 못한 자리로 데려다 놓기 일쑤지. 나 역시 출근길의 환승역이 싫어져 무작정 직장을 관뒀을 때만 해도 여행작가가 될 줄은 몰랐다.
빗방울이 후두두 떨어졌다. 카리브해의 섬나라는 하루에도 몇번 날씨가 바뀌곤 한다. 외투에 달린 후드로 머리를 가렸다. 여우비인가 했는데 빗방울이 지면에 닿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굵어졌다. 식당이나 카페는 보이지 않았다. 언제 비가 그칠지 모르는데 우두커니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낡은 성당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 성당엔 앉을 의자가 있을 테지! 달려가 성당 안으로 들어섰다. 이 성당의 이름은 산토크리스토델부엔비아헤. ‘부엔 비아헤’라니! 이건 여행자에게 전하는 인사말(좋은 여행 하세요!)이 아닌가?
성당에 앉아 있는 사이 같은 처지인 사람들이 하나둘 안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은 창가에서 동행인과 담소를 나누거나, 십자가를 보며 기도를 하거나, 문가에서 밖을 바라보았다. 해가 나길 기다리며. 그 장면 하나하나가 어떤 상징이나 비유 같았다.
연상호 감독은 <지옥>에서 택시기사를 통해 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저는 신이 어떤 놈인지도 잘 모르고 관심도 없어요. 제가 확실히 아는 건 여긴 인간들의 세상이라는 겁니다. 인간들의 세상은 인간들이 알아서 해야죠.” 그런데도 인간들의 세상에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카마궤이의 낡은 성당이 답해줄지도 모르겠다. 인생의 미로에서 궂은비 만난 이들에겐 해가 날 때까지 쉬어 갈 수 있는 은신처가 필요할 거라고.
비가 그치자 성당 문을 나선 사람들이 뿔뿔이 제 갈 길을 찾아 흩어졌다.
노동효(<남미 히피 로드> 저자·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