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비통 남성 컬렉션 아티스틱 디렉터 버질 아블로. Copyrights by Fabien Montique. 루이 비통 제공
2021년 11월28일 버질 아블로라는 1980년생 디자이너가 희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의 신문을 포함해 세계적인 언론사들이 일제히 부고 기사를 냈다. 그가 속했던 루이 비통 모엣 헤네시 그룹(LVMH) 차원에서도, 카녜이 웨스트를 비롯한 세계의 스타들도 버질 아블로를 추모하는 메시지를 올렸다. 궁금할 수 있다. 버질 아블로가 누구고 뭘 했길래 이렇게까지? 고가 패션계라는 자기들만의 업계 속 유명인사의 이른 부고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버질 아블로는 생각보다 대단한 일을 한 사람이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은 17살 버전의 나를 위한 것이다.” 버질 아블로가 생전에 남긴 이 말은 그가 해온 일들의 요약이기도 하다. 그는 거리 청소년들의 옷이었던 스트리트웨어를 루이 비통 같은 고가품의 세계로 올렸다는 평을 듣는다. 그러나 거리의 하위 문화는 20세기 내내 패션계가 끌어다 쓰던 영감의 한 갈래였다. 크게는 청바지부터가 노동계급의 옷이었고, 구체적으로는 비비안 웨스트우드나 디스퀘어드도 자신이 속한 세계의 거리 문화를 고가 의류의 런웨이로 올렸다. 그렇게 옛날 예를 들 필요도 없다. 스트리트웨어가 고가 의류의 세계로 들어간 건 2010년대부터 나타나던 고가 의류계의 큰 흐름이다.
버질 아블로는 11월28일 세상을 떠났는데 12월1일 미국 마이애미에서 패션쇼가 예정되어 있었다. 유족의 뜻에 따라 쇼는 취소 없이 진행되었다. 이 쇼에서 버질 아블로의 동상 이미지가 공개되었다. 루이 비통 시이오 마이클 버크 역시 별도의 추도사를 낭독했다. 루이 비통 제공
버질 아블로가 탁월했던 부분은 거리 문화를 사용했다는 자체가 아니라 거리 문화를 사용한 이유에 있다. 버질 아블로는 패션뿐 아니라 디자인, 음악, 공연 등에서 활약한 전방위 문화 생산자였다. 요즘은 이런 일을 일컫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직함이 있고, 그 말은 하는 일 없이 멋만 부려서 수상쩍은 사람들의 명함에 찍힌 말이기도 하다. 버질 아블로와 사기꾼의 차이는 원칙의 유무다. 버질 아블로는 자신의 눈으로 현대 사회를 해석한 뒤 원칙을 만들고, 그 원칙에 입각해 제품 제작에 참여했다.
2017년 10월 공개된 강의에 그 원칙이 드러나 있다. 버질 아블로는 하버드 디자인 대학원에서 열린 강의에서 자신의 디자인 방향성을 7개로 정리했다. 레디메이드, 인용, 3%, 두가지 영역 사이에서의 타협, 작업 중, 물건의 존재 이유, 여행자와 순수주의자 모두에게 다가가기. 이 수수께끼 같은 말들은 버질 아블로의 물건들을 만들어내는 엑셀 함수 같은 개념이다. 버질 아블로는 변기를 예술품이라 이름 붙인 마르셀 뒤샹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그 결과 기성품의 3%만 바꾸는 디자인을 추구했다. 아울러 고가품과 스트리트웨어 사이 어딘가의 영역을 만들었다. 동시에 ‘그 물건이 왜 있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놓치지 않았다. 이 기준을 염두에 두고 버질 아블로가 제작에 참여한 물건들을 보면 실제로 모두 그렇게 제작된 물건임을 알 수 있다. 원칙에 입각해 알고리즘을 만든 뒤 그 알고리즘을 계속 대입한 것이다. 인스타그램 필터처럼.
자신의 디자인 규칙이 있다면 이론적으로는 무한히 디자인을 다른 영역에 입힐 수 있다. 버질 아블로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버질 아블로가 컬래버레이션 제품을 굉장히 많이 만들 수 있었던 이유다. 그는 에비앙 생수나 이케아와의 가구 컬렉션 등 보통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제품을 만드는 회사들과도 활발히 함께 작업했다. 메르세데스 벤츠 등 자신의 분야와 상관없는 회사와도 협업을 진행했다.
버질 아블로가 그렇게 다양한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최신 의사소통 기술을 아주 활발히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디자인을 스마트폰 메시지와 키보드로 한다고 했다. 채용을 인스타그램 디엠(DM)으로 할 정도로 소셜 미디어 활동도 활발했다. 그를 ‘인스타그램 시대의 영웅’이라 부르는 것도 과언이 아니다. 이건 흥미롭게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거의 하지 않는 현재의 스타 디자이너들과 대척점에 있는 부분이다. 버질 아블로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현대 패션계의 관심을 받고 있는 피비 파일로는 에스엔에스 계정이 없다. 시대를 풍미했던 에디 슬리만 역시 “21세기에 남은 유일한 럭셔리는 프라이버시”라고 했다. 에디 슬리만의 일상 역시 에스엔에스로는 전혀 볼 수 없다.
루이 비통은 버질 아블로 사후 곳곳에 ‘버질이 여기 있었다’라는 메시지를 띄웠다. 청담동 루이 비통 매장. 루이 비통 제공
무엇보다 버질 아블로는 인품이 달랐다.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패션 피플’의 모습이 있다. 사납고, 아무거나 안 먹고, 매사에 눈살을 찌푸리고, 꽁해 있는, 히스테릭한 예술가의 모습(경험상 어느 정도는 그런 것 같다). 버질 아블로는 그런 이미지와도 정반대였다. 그의 생전에 나온 <파이낸셜 타임스> 기사에서는 버질 아블로가 누구에게도 화를 내지 않았다는 언급이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버질 아블로의 친절에 감사하는 회상들이 쏟아졌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것, 특정 직군의 성격이 가진 스테레오타입과 달랐다는 게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21세기는 여러모로 괴팍한 예술가의 시대를 벗어나는 중이고, 버질 아블로의 친절이 그 예 중 하나다.
이렇듯 버질 아블로는 아주 부드러우면서도 급진적인 방식으로 현대의 패션 게임을 3% 정도 바꿨다. 그 3%가 바뀌면서 패션 게임은 조금 다른 게 되었다. 협업이 일상화됐고 고가 패션계는 더 많은 다양성을 받아들였다. 그 3%를 바꾼 버질 아블로 본인은 패션계의 기존 공식과 모든 게 달랐다. 그는 루이 비통 역사상 최초의 아프리카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다. 패션을 전공하지 않았고, 패션계의 파워 그룹인 게이도 아니었다. 그래서 버질 아블로가 어디까지 갈지 궁금한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었다. 그는 늘 뭔가 다른 걸 했고, 이렇게 끝날 거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업계를 떠났다.
버질 아블로는 시장 위에서 능숙하게 파도를 타며 늘 사람들에게 친절했던 예술·사업가였다. 시장에서 활동한 사람의 가치는 시장이 매겨준다. 버질 아블로의 사망 소식 직후 버질 아블로가 제작한 모든 제품 가격이 폭등했다. 나이키 스니커즈부터 이케아와 함께한 러그까지. 그의 가치는 이미 증명되었고, 앞으로도 계속 증명될 것이다. 천재가 발명한 개념은 사라지지 않으니까.
박찬용(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