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파라치 역사지구의 밤거리 풍경. 노동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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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유산을 얼마나 많이 상속받았기에 여태껏 여행을 다니는 거야?”
지인들이나 여행길에서 만난 벗들이 종종 묻곤 한다. 정색하고 물으면 솔직히 털어놓는다. “실은 평생 누려도 다 누리지 못할 유산을 물려받았어.” 심지어 상속받은 재산이 매년 불어나 22세기에 지구를 떠나더라도 다 누리지 못할 정도인 걸 어떡하랴. “지금은 얼마쯤 되는데?” 구체적인 ‘액수’를 대라고 다그치면 별수 없이 대답한다. “1000개가 넘어.” ‘개수’로 대답하니 상대가 멈칫했다가 되묻는다. “설마 1000개 넘는 비트코인을 갖고 있니?” 10년 전엔 단돈 5000원으로 1000개의 비트코인을 살 수 있었다, 라고 하더라만 내가 그런 걸 알았을 리 있나? 나의 포트폴리오를 채우는 주요 종목으로 1000개 넘게 물려받은 건,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브라질 파라치 역사지구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 노동효 제공
브라질 파라치 역사지구의 기념품 가게 진열장. 노동효 제공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문화유산, 자연유산, 복합유산으로 나뉜다. 1972년 이집트에서의 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한 고대 누비아 유적을 보호하기 위해 ‘세계 문화·자연유산 보호 협약’을 만들며 사업이 시작되었다. 현재까지 지정된 세계유산은 1154개. 그중 다수는 건축물이나 유적지 같은 ‘문화유산’으로 897개, ‘자연유산’으론 218개, ‘복합유산’은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의 특징을 동시에 충족하는 장소로서 드물긴 하지만 전세계에 걸쳐 39개가 있다. 마추픽추, 카파도키아가 복합유산이란 걸 떠올리면 어떤 곳이 선정되는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가장 최근 복합유산으로 선정된 곳은 브라질의 ‘파라치와 일랴그란지섬’이다.
범죄율로 악명 높은 리우데자네이루에서 3주, 아무 일도 당하지 않았지만 잦은 사건 소식으로 정신적 피로가 쌓일 무렵이었다. 플로리파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는 치아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직도 리우야?” “응. 슬슬 다른 도시로 옮길까 해.” 얘길 나누며 어제 벌어진 일을 꺼냈다. “저녁식사 하고 숙소로 오다가 불량배들을 만났어. 정말 운 좋게 벗어났는데 이젠 좀 지치네.” 코파카바나 해변을 찾은 여행자가 카메라를 뺏기지 않으려다가 강도에게 폭행당한 소식을 들은 게 보름 전, 관광명소인 셀라롱 계단을 방문한 여행자가 강도에게 폰을 뺏기지 않으려다가 폭행당한 소식을 들은 게 일주일 전이었다. “파라치로 옮겨. 안전할 뿐 아니라 역사지구는 정말 아름답지. 물놀이하기도 좋은 해변 도시야!”
파라치행 버스에 올랐다. 동해안 7번 국도 같은 코스타베르지를 지나는 동안 창밖으로 푸른 바다가 찬란하게 반짝였다. 리우와 상파울루 사이 파라치까진 4시간, 도착 후 터미널 근처에 자리한 호스텔에 짐을 풀었다. “역사지구는 어느 쪽이죠?” “큰길로 가서 동쪽으로 5분만 걸으면 역사지구야!” 주인장의 안내대로 차도를 따라가자 역사지구가 나왔다. 아스팔트 도로가 끝나고 조약돌길이 시작되는 곳. 하얗게 칠한 외벽, 색색으로 칠한 대문들, 노랗게 반짝이는 등. 해가 저물자 가게마다 불이 켜지고 해변에서 돌아온 관광객이 식당과 술집을 찾아서 혹은 쇼핑을 하러 역사지구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조약돌길 옆으로 늘어선 고풍스러운 건물과 아기자기한 수공예품으로 가득한 가게들. 역사지구에 들어선 지 30분도 되지 않아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식사하러 나온 것도 잊은 채 황홀한 골목에 취해 걸었다. 걷다 보니 강이었다. 다리 위에서 보름달 뜬 바다를 바라보는 동안 밀물이 강을 향해 차올랐다. 리우를 떠나기 전 치아구가 들려준 얘기가 생각났다.
“파라치는 투피족 언어로 물고기 강이란 뜻이야. 지금도 대서양의 브라질 숭어는 알을 낳기 위해 파라치의 강으로 돌아오지.” 그는 파라치의 역사를 차근차근 들려주었다. “포르투갈 출신의 프리메이슨들이 그곳에 도시를 세운 건 350년 전이야. 30년쯤 지나 미나스제라이스에서 금광이 발견되었지.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금광이었어. 금을 리우와 본토로 옮기기 위한 선박이 항구를 오가면서 파라치는 전성기를 맞았어. 도시가 번성하자 금을 탈취하려는 해적도 몰려들었지. 광산에서 리우로 안전하게 금을 옮기기 위해 도로를 놓으면서 파라치는 쇠퇴하기 시작했어. 금이 바닥나자 버려진 도시가 되고 말았지.”
파라치 도심을 관통하는 강의 하구. 노동효 제공
파라치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트린다지 해수욕장. 노동효 제공
그랬던 도시가 어떻게 관광명소가 된 걸까? “카샤사(사탕수수에서 추출한 증류주로, 브라질 대표 칵테일 카이피리냐의 기초가 된다)를 생산하면서 잠깐 경기가 나아지긴 했지. 그렇지만 더 이상 도시가 아니라 물고기 낚고 사탕수수 농사를 짓는 시골이었어. 그러다 1970년대에 이르러 산투스에서 리우를 잇는 포장도로가 놓였지. 차를 몰고 온 사람들이 파라치를 재발견했어. 포르투갈 식민지 시절의 건물과 성당이 그대로, 조약돌 깔린 골목이 그대로 남아 있는 해변 도시를!”
잊힌 덕분에 옛 건물과 길을 고스란히 간직한 파라치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상파울루에서 330㎞, 리우에서 240㎞, 도시인이 주말 나들이 삼아 방문하기에 적당한 거리였다. 시에선 원도심을 보존하기 위해 역사지구로 지정한 뒤 차량 통행을 막고, 상인은 여행자가 고풍스러운 골목의 흥취를 누릴 수 있도록 가게를 꾸몄다. 여행자는 낮 동안 모래사장에서 해수욕을 즐기다가 해가 저물면 골목을 쏘다녔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톰 크루즈, 믹 재거 등 셀럽들이 찾아왔고 영화 〈트와일라잇〉 시리즈에서 주인공의 신혼여행지로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걷다 보니 허기가 지는구나! 중앙광장 곁길 가운데 테이블을 놓은 식당에 앉았다. 보행자 전용 거리니 가능한 풍경이었다. 주문한 요리를 내려놓는 종업원에게 물었다. “푸에데 아블라 에스파뇰?”(스페인어 할 줄 아니?) “응!” 궁금한 걸 물어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차량을 막으면 크고 무거운 물건은 어떻게 옮겨?” “내가 다 짊어지고 들고 와.” “뭐라고?” “하하하, 농담이야! 수레로 옮기거나 요일을 정해서 차량을 허용하면 되지. 주말여행객도 떠나고 가장 한산한 수요일 낮엔 입구를 열어.” “불편하지 않아?” “대신 여행자들이 편안하게 길을 걸을 수 있잖아!”
식사 후 해변까지 산책하는 동안 곳곳에서 프리메이슨의 기호가 새겨진 기둥과 집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건물은 주로 파란색과 흰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들은 구대륙에서 계몽주의자라는 이유로, 이단이란 이유로 박해받았고 일부는 신대륙으로 와서 도시를 건설했다. 33을 최고의 숫자로 여긴 그들은 도시를 33개 블록으로 나누고, 프리메이슨 문양을 새긴 건물을 지었다. 골목을 거니는 사이 가게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아, 지난 한달 동안 브라질의 밤거리를 걸으며 이토록 편안했던 적이 있었던가!
다음날 아침 해수욕을 하러 갔다. 파라치 해안 곳곳에 육로가 닿지 않는 누드비치가 있고 보트가 오간다고 했다. 나는 마을버스를 타고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트린다지 해변으로 갔다. 이색적인 해변이 있다고 했다. 30분쯤 지나 버스가 섰다. 피서객으로 가득한 백사장을 지나쳐 고개를 넘자 독특한 공간이 나타났다. 거대한 갯바위가 해안을 감싸고 있었고 가운데는 그 자체로 천연 풀장이었다. 깊은 곳이 가슴팍쯤, 수정처럼 맑은 물 사이로 열대어가 오락가락했다. 잠수하거나 헤엄치다가 지치면 나무 그늘 아래서 쉬었다. 맹그로브도 아닌데 어떻게 나무가 자라는 걸까?
한낮엔 해변에서 놀고 저녁엔 어김없이 역사지구로 외출했다. 햇볕을 가릴 차양모와 기념품도 샀다. 공산품이 아닌 독특한 수공예품들로 가득했다. 길과 가게를 들락날락하다 보면 미술관의 수많은 전시실을 드나드는 기분이었다. 아름다운 자연을 누리는 것 못잖게 아름다운 골목을 누리는 것 또한 큰 행복이란 걸 만끽하던 날들. 파라치의 원도심을 부숴 철근콘크리트로 빌딩을 짓고 아스팔트로 길을 깔았더라면 지금의 파라치는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파라치 역사지구 외곽을 운행하는 마차. 노동효 제공
프리메이슨의 문양(왼쪽 건물 모서리)이 있는 건물. 노동효 제공
멋진 도시를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이 뭘까? 어쩌면 도시나 마을 곳곳에 ‘보행자 전용 거리’를 더 많이 만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차 안의 사람들은 거리의 사물을 꼼꼼히 보지 않는다.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을 음미할 보행자가 적은 거리에선 시간이 지날수록 상점 간판만 커진다. ‘진짜 원조’. 간판으로도 모자라 유리창을 온통 호객용 활자로 채운다. ‘파격 세일’. 그와 달리 보행자 전용 거리에선 시간이 지날수록 예쁜 골목이 자연스레 형성되었다. 그런 모습을 세계 곳곳에서 목격했다. 상인은 저마다의 미적 감각으로 골목을 꾸미는 데 공을 들였고 자신들이 만든 골목으로 여행자가 모여들면 기뻐했다. 세기가 흐른 후 그 골목이 ‘세계유산’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미래로 흐르는 시간을 생각하면 한국의 모든 도시와 거리가 세계유산 ‘예정지’다. 그래, 다음 세기의 후손들이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우린 조상 잘 둔 덕분에 많은 유산을 물려받았어!”
노동효(<남미 히피 로드> 저자·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