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은 갈대라지. 봄을 애타게 기다리면서도 겨울을 놓지 못하는 내가 그렇다. 최근엔 유독 눈이 인색했다. 무엇보다 적설량이 성에 차지 않았다. 이대로 겨울이 끝나버릴까 발을 동동 구르던 차에 때마침, 폭설이 내린다는 소식에 절로 웃음이 났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강원도 강릉과 평창 사이에 자리한 고개, 대관령으로 향했다. 완벽한 설원, 새하얀 눈밭을 찾아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눈이 많이 내린다는 대관령. 겨울철이면 영서지방의 대륙 편서풍과 영동지방의 습기 많은 바닷바람이 만나 이루어내는 하얀 세상이다. 그중 강릉과 평창의 경계에 있는 선자령을 찾았다. 이곳은 사계절 서정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초원과 야생화가 어우러진 그림 같은 언덕이다. 특히 가을철이면 은빛 물결의 억새가 장관이라 백패킹의 성지를 이룬다. 악명 높은 바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발길이 끝없이 이어진다. 시린 겨울바람이 불어오면, 방문객들도 차츰 자취를 감추지만 이곳의 매력을 아는 사람들에겐 이때가 성수기다. 하늘에서 펑펑 눈이 내려와 언덕을 덮은 선자령의 겨울은 그야말로 눈이 부시다. 새하얀 눈밭과 함께 하얀 풍차가 그려낸 이국적인 정취는 마치 순정만화의 한 장면처럼 낭만으로 점철된다. 무엇보다 아무도 밟지 않은 보송보송한 눈밭을, 세상에서 가장 먼저 내디뎌보는 짜릿함이란!
해발 1157m로 꽤 높은 선자령이지만 걱정할 것은 없다. 어린아이도 수월하게 오를 수 있는 완만한 경사에 시작점인 대관령휴게소가 해발 약 850m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눈 덮인 전나무 숲길을 걸어본 적 있으신지? 너무 많이 쌓여버린 눈 때문에 가지마다 힘겹게 눈을 이고 있는 전나무 가득한 숲길은 그 특유의 정취로 방문객을 유혹한다.
새하얀 눈밭과 함께 하얀 풍차가 그려낸 이국적인 모습의 선자령. 강릉바우길 제공
우리는 걷는 내내 살짝만 나무에 부딪혀도 가지에서 떨어진 싸라기눈들로 함박눈을 맞았다. 하늘을 가린 전나무가 빼곡히 숲을 채우고 하얀 눈으로 옷을 갈아입은 모습이 서른살 겨울을 함께했던 겨울의 나라, 핀란드의 어느 숲길을 닮은 것도 같았다. 푹신한 눈의 촉감이 좋은지 폴짝폴짝 뛰고, 맛보고, 서로 장난치며 신이 난 반려견 겨울, 바다 역시 나만큼이나 달떠 있었다.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복숭아뼈까지 푹푹 빠지며 눈밭을 걸었다. 이 순간들 어디 즈음에선 선자령 최고의 1분으로 기억에 남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선자령은 소설가 이순원과 함께 뜻있는 강릉시민들이 모여 만든 총 150㎞의 강릉 바우길 10개 중 첫번째 코스가 되었다. 바람의 언덕, 선자령과 눈 쌓인 설원이 풍력발전기(풍차)와 함께 어우러진 이국적인 풍광을 표현했다 하여 그 이름도 선자령 풍차길이다. 2020년 5월에는 반려견과 걷기 좋은 여행길로 선정되었다고. 드넓은 자연 속에서 반려견과 함께하니 이만한 추억이 또 있을까.
언덕에 올라 시원하게 펼쳐진 능선을 마주했을 때, 나는 후회했다. 배낭을 가지고 왔어야 했다고. 이토록 아름다운 눈의 언덕에서 언제고 느긋하게 설원을 즐길 수 있었을 테니까. 텀블러를 꺼내 뜨거운 커피 한잔으로 잠시 몸을 녹였다. 향긋한 커피가 모세혈관까지 구석구석 온기를 전했다. 그래. 더 있어봐야 춥기만 하지 뭐. 하얀 눈 위에 2평짜리 작은 집을 짓고 설원 한가운데 누워 있고 싶은 간절함을 나는 그렇게 달랬다.
백패킹과 차박은 거추장스러운 것보다 미니멀한 것, 혹은 실속을 더 중요시하는 이들에게 환영받는 캠핑의 방식이다. 겨울 산엔 어떤 방식이 더 좋을까. 백패킹은 설원을 원 없이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게 장점이다. 아름다운 일출과 일몰도 감상할 수 있다. 그러나 겨울철 백패킹은 철저한 준비가 밑받침되어야 한다. 심설이 쌓인 겨울 산정에서의 백패킹 낭만은 그만큼 위험에 확실히 대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꼭 필요한 장비로 텐트, 매트리스, 동계용 침낭, 보온용 옷(우모복), 리액터(버너) 정도가 있다.
텐트는 동계용이 있으면 좋고 최소한 삼계절용으로 준비한다. 그라운드시트나 매트리스를 여러겹 까는 방식으로 냉기를 차단하는 게 핵심이다. 개인적으로는 매트를 여러겹 깐 뒤 에어매트를 추가로 올려주니 훨씬 더 좋았다. 침낭은 동계용이면 좋지만 삼계절용 침낭 두개를 겹쳐 사용해도 무리가 없다. 추가로 침낭 안에 중간중간에 구멍이 뚫린 침낭 내부용 에어매트인 이너시아를 넣으면 보온에 도움이 된다. 많은 전문가들이 겨울철에는 일반 버너보다 추위에 강한 휘발유 버너를 권하지만 사용법이 까다로운 게 단점이다. 리액터는 복사열을 사용하는 방식이라 바람에도 대응력이 있고 난로처럼 사용할 수 있어 유용하다.
추위에 심약한 나는 설원의 낭만 ‘텐풍’(텐트를 친 풍경을 일컫는 말)을 포기하고 차박을 선택했다. 내게는 밤새 사락사락 눈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들 수 있는 설중차박의 낭만이 있으니까. 게다가 바깥이 아무리 추워도 상관없는 겨울 차박의 천하무적 무시동 히터도 있다. 무시동 히터는 차량의 시동을 켜지 않고도 전기와 연료를 사용해 차 내부의 공기를 데워주는 장비다. 영하 20도의 한파에도 반소매를 입고 잠들 수 있을 만큼 따뜻함을 자랑하지만, 최초 설치 비용이 많이 드는 게 단점이다. 무시동 히터가 없다면 외부에서 들어오는 한기를 꼼꼼히 차단하는 게 중요하다. 바닥 평탄화를 마친 뒤 잠자리를 깔기 전에 발포매트 혹은 돗자리를 깔아 아래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차량용 커튼을 사용해 창에서 들어오는 냉기를 막아준다.
이국적인 인증샷을 남기고 싶다면 강원도 인제군에 자리한 원대리 자작나무숲을 추천한다. 곧게 뻗은 하얀색 자작나무가 아름다운 곳으로 여기에 새하얀 눈까지 내리는 겨울이면 ‘설경 명소’로 빼놓을 수 없다. 이곳의 하이라이트까지는 안내소에서 40여분 걸리는데, 자작나무숲 한가운데 자리한 자작나무 움막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인생샷 명소로 손꼽힌다. 트레킹 코스는 7개가 있지만, 겨울철에는 1·2코스만 운영한다. 동절기 입산은 오후 2시까지로 늦어도 오후 5시에는 하산해야 한다니 참고하자.
힘들이지 않고 편하게 즐기는 설경을 원한다면, 정선의 만항재가 제격이다. 해발 1313m에 자리한, 우리나라에서 차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이다. 하늘과 맞닿을 정도로 높이 솟은 소나무가 빽빽한 이곳은 눈이 내리면 그야말로 겨울왕국이 따로 없다. 3㎞ 정도 거리의 가볍게 산책하기 좋은 탐방로가 있고, 한시간 정도 등산하면 함백산 정상에 오를 수 있어 큰 힘 들이지 않고도 눈꽃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반려견과 함께 즐기는 설경 맛집이라면 정선의 운탄고도만큼 훌륭한 선택은 없을 테다. 운탄고도는 함백역에서 만항재까지 이르는 40㎞의 해발 1000m 산비탈 임도로 1980년대까지 석탄을 실어 나르던 길이다. 한번 시작하면 중간에 빠져 대중교통을 타고 나올 수 없는 산길이므로 백패킹을 추천한다. 일부 구간만 걷고 싶다면, 만항재에 주차하고 하이원리조트 방향으로 걷다가 원점 회귀하거나 하이원 둘레길 운탄고도 구간 트레킹이 유리하다.
📌 알아두면 좋아요!
🚌 선자령 차박 : 차박 시 대관령휴게소 주차장을 이용할 수 있다. 단, 텐트나 타프 등의 부속물을 설치하지 않는 스텔스 모드로만 가능하며 주차장에서의 취사, 불멍은 불법이다. 식음료 등은 휴게소에서 살 수 있다. 화장실은 휴게소 운영 시간인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 사이에만 이용할 수 있다. 이 외 시간은 문이 잠기니 참고하자.
⛺ 선자령풍차길 : 대관령휴게소를 출발해 한일목장길과 선자령 동해전망대를 지나 원점 회귀하는 코스로 5~6시간 걸린다.
⛄ 눈꽃 트레킹 : 방수가 잘되는 등산화, 등산 스틱, 아이젠, 스패츠, 귀마개가 달린 방한모자, 방수가 되는 따뜻한 장갑, 두꺼운 보온 양말과 젖었을 때를 대비한 여분의 양말을 준비한다. 특히, 강원도 겨울 트레킹 때에는 내린 눈이 녹지 않고 그대로 얼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눈 예보가 없어도 아이젠과 스패츠는 ‘필수’다.
🐶 반려견 동반 : 반려견 인식표, 목줄, 배변 봉투는 반드시 지참하고, 트레킹 시 인적이 드문 곳이라도 리드줄은 보호자와 2m 이내의 간격을 유지해야 한다.
홍유진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