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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남아메리카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등록 2022-03-18 08:59수정 2022-03-18 09:14

노동효의 지구 둘레길 : 남아메리카

우루과이·칠레·아르헨티나…
가난하지만 행복지수 높은 나라
아이와 노약자를 위한 배려
학교에선 장애 구분 없이 함께
아침 급식을 먹는 페루 초등학교의 아이들. 노동효 제공
아침 급식을 먹는 페루 초등학교의 아이들. 노동효 제공

“양놈들은 예의도 모르는 것들이야!”

아직 후진국이던 시절, 주한 미국 대사나 서양인 교수가 경험한 ‘한국의 미덕’이 신문에 실린 날엔 교사들이 칼럼 내용을 전해주며 저 말을 내뱉곤 했다. 심심찮게 전해 들었던 경험담은 대동소이했다. “한국 버스나 지하철에 노약자가 승차하면 젊은이가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다. 심지어 어린이가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기도 했다. 내 나라에선 결코 보지 못했던 풍경이었기에 감동받았다. 노약자에 대한 배려가 일상에 배어 있었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내 나라가 한국의 아름다운 전통문화를 본받으면 참 좋겠다.”

우리는 뿌듯했고, 사연은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갔다. “엄마, 담임선생님이 그러시는데 미국에선….” 가난하지만 선진 국민이 본받으려는 문화를 가진 나라의 국민이란 게 자랑스러웠다. 그랬던 한국이 세계 10대 경제국이 되었다. 이젠 우리가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에서 배울 차례가 된 셈이다. 지난 세기 한국 문화를 본받고 싶다던 선진 국민처럼.

민들레 홀씨를 불어서 날리는 아르헨티나 아이. 노동효 제공
민들레 홀씨를 불어서 날리는 아르헨티나 아이. 노동효 제공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의 담벼락에 그려진 벽화. 노동효 제공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의 담벼락에 그려진 벽화. 노동효 제공

가난하지만 행복한 나라

남아메리카에서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한국보다 높은 나라는 없다. 2021년 기준, 대략 우루과이 1만7천달러, 칠레 1만6천달러, 아르헨티나 1만달러, 브라질 8천달러, 페루 7천달러, 콜롬비아·에콰도르 6천달러, 파라과이 5천달러. 가장 높은 우루과이도 한국의 2분의 1 수준이다. 그런데 유엔의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행복지수(1~10점으로 나뉜다)가 우루과이·칠레·아르헨티나·브라질·콜롬비아는 6점 이상으로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한국(5.845점)보다 높다. 국가 경제가 파탄 난 베네수엘라를 제외하면 나머지 국가들(페루, 볼리비아, 에콰도르, 파라과이)도 5점 중후반대로 한국과 엇비슷하다. 정신승리였을까? 2년여 남아메리카를 둘러본 경험으론 ‘포용의 문화’가 이끈 값이 아닐까, 하고 짐작한다. 우리보다 가난하지만 우리가 배워야 할.

볼리비아 여행 중 비자 만료일을 놓치는 바람에 범칙금을 내야 할 사정이 생기고 말았다. 담당 관청은 은행에서 해당 금액을 낸 뒤 납부증을 받아 오라고 했다. 온라인뱅킹이 일상화된 한국과 달리 은행 밖까지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오늘 비자 연장 서류를 내야 하는데….’ 조급했다. 어쩔 수 없이 줄을 섰는데 청원경찰이 뒤에 도착한 사람 중 몇몇을 자꾸 입장시켰다. 부정부패에 대해 익히 들었지만 많은 사람이 보는 데서 부정을 저질러도 되는지 화가 났다. 저들을 먼저 들여보내면 내 시간이 지체될 건 뻔한 일이었다. 1시간쯤 지나 객장으로 들어섰다. 번호표를 뽑고 기다렸다. 그 와중에도 청원경찰이 사람들을 정중히 모시며 들어오곤 했다. 귀빈(VIP) 고객이라도 되는 걸까? 번호표도, 대기도 없이 바로 일을 보게 하다니! 근데 귀빈 고객이라기엔 너무나 평범했다. 궁금해져 새치기(?) 고객들을 관찰했고 여덟명째 이르러 알아챌 수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아이와 함께 온 이였다.

“여기도 그래요!” 쿠스코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는 부부와 식사를 하다가 볼리비아에서 겪은 얘길 했더니 페루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은행과 우체국 포함 다른 관공서에서도 아이와 함께 온 사람과 임산부는 기다리지 않고 일을 볼 수 있도록 배려한다고 했다. 새 생명이, 새 생명을 낳은 어버이가, 새 생명을 양육하는 이가 그 사회에서 가장 존중받아야 할 귀빈이었다.

“여긴 아침 급식도 있어요. 집이 멀거나 식사를 거르고 등교한 아이를 위한 배려죠.” 그 얘길 들으며 고국을 떠올렸다, 아이를 미래 노동력 제공 대상으로 여기며 출산율을 걱정하는 모습을, 매년 신생아를 위한 국가지원금은 늘지만, 출산율은 하락 일변도인 모습을. 어쩌면 지원금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새 생명을, 생명을 낳고 기르는 이를 존중하지 않는 시선과 언행이 모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출산율 최하위 국가를 만든 게 아니었을까? 브라질의 버스터미널 매표소 앞에 줄을 섰는데 한쪽엔 줄 서지 않은 사람들이 도착 즉시 표를 구매했다. 아이를 동반한 이와 노약자를 위한 별도의 매표소였다. 한국을 포함한 대다수 국가가 비준한 ‘유엔아동권리협약’ 제3조는 말한다. ‘정부는 아동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여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해야 한다.’

그림을 그리는 딸과 어머니. 노동효 제공
그림을 그리는 딸과 어머니. 노동효 제공

광장의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는 에콰도르 아이들. 노동효 제공
광장의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는 에콰도르 아이들. 노동효 제공

잔소리할 때도 “내 사랑”

에콰도르의 장수마을 빌카밤바에서였다. 광장에서 떠돌이 악사의 노래를 듣고, 수공예품을 파는 히피로부터 목걸이를 사고 호스텔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오늘 저녁은 스파게티를 해 먹을까, 하고 조그만 가게에 들렀다. 진열대 사이를 오가는 동안 가게 주인의 말소리가 들렸다. “미 아모르, 숙제부터 하고 티브이(TV) 봐야지!” “미 아모르, 엄마 머리끈은 또 어디에 뒀니?” 토마토·파프리카·마늘은 찾았는데 스파게티 면이 보이지 않았다. “스파게티 면은 어딨죠?” 진열장 사이로 나타난 아주머니가 선반 아래를 가리키다가 바닥에서 뒹구는 장난감을 발견했다. “미 아모르, 장난감은 치워야지!” 아이를 꾸짖는 말이었다. 근데 미 아모르, 즉 ‘내 사랑’으로 첫마디를 떼선지 ‘미 아모르’를 두운으로 한 시를 낭송하는 듯했다. 계산하며 아이 얼굴을 보았다. 티브이를 더 보고픈지 행동이 느릿했지만 얼굴에서 심술을 찾을 순 없었다. 하긴 ‘내 사랑’이라고 부르는데 모를 리 있겠는가, 엄마가 지금 잔소리를 늘어놓지만 자신을 진정 사랑한다는 사실을.

한국 아동이 부모로부터 가장 듣고 싶은 말 1위는 “잘했어”고, 2위는 “항상 사랑해”라고 한다. 에콰도르 가게 주인뿐 아니라 볼리비아인 친구 넬슨도 딸에게 말을 걸 때면 항상 “내 사랑”이라고 불렀고, 훈육할 때도 ‘내 사랑’이라고 먼저 불렀다. 잔소리할 때도 ‘내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마음이 여유로운 사회였던 걸까? 한국뿐 아니라 모든 아이는 잘했든, 못했든 “항상 사랑해”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 사랑받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기에.

파라과이 여행 중 소도시의 초등학교를 방문했다. 건축가 유현준의 조언대로 지은 듯 1층 교실로만 이루어진 학교였다. 아이들이 교실 문을 젖히고 나오면 바로 운동장이었다. 특수학급 교사가 학교를 안내해줬다. 발달장애 학생을 위한 교실이 일반교실 가운데 자리했고, 다양한 연령의 발달장애 학생이 그림을 그리고 퍼즐을 풀었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 일반학급에서 나온 아이들이 발달장애학급으로 뛰어들어왔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교구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장애 학생과 비장애 학생이 머리를 맞대고 퍼즐을 맞췄다.

“이건 이렇게 놓아야 하지 않을까?”

“아냐, 이게 맞다니까!”

한국에서 정규교육을 받는 동안 한번도 경험한 적 없는 풍경이었다. 그래서 교실 안 풍경이 매우 낯설었지만, 장애 구분 없이 함께 어울려 퍼즐을 풀고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수업이 끝나고 키 작은 아이와 덩치 큰 발달장애 학생이 손잡고 정답게 얘기 나누며 교문 밖을 나가던 모습을, 나는 잊을 수 없다. 행복지수는 ‘포용의 문화’로 올라간다.

손끝에 꽃으로 고깔을 씌우고 활짝 웃는 파라과이 아이. 노동효 제공
손끝에 꽃으로 고깔을 씌우고 활짝 웃는 파라과이 아이. 노동효 제공

브라질 해변에서 아버지와 노는 아이. 노동효 제공
브라질 해변에서 아버지와 노는 아이. 노동효 제공

발달장애 학생이 만든 작품을 보여주는 파라과이 특수학급 선생님. 노동효 제공
발달장애 학생이 만든 작품을 보여주는 파라과이 특수학급 선생님. 노동효 제공

‘차별금지법’이 제정된 나라

만약 한국이 200명이 사는 마을이라면 10명이 장애인이고, 그 10명 중 1명은 발달장애인이다. 수도권의 장애인 인구비는 20%에 이른다. 그에 비해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접하는 횟수는 적다. 이동의 불편함 때문에 장애인이 집 밖으로 나서기 어렵기 때문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같은 나라에 살지만 동떨어져 산다. 장애인 이동권을 위한 예산을 늘리자는 요청엔 무심하고, 특수학교와 일반학교를 통합하지도 않은 채 제 주거지에 특수학교가 설립되는 건 거부하면서 ‘특수학교와 통합교육’ 관련 논의를 하는 걸 들을 때면 영화 <원더>의 대사가 떠오르곤 했다. 남들과 다른 외모로 태어난 아이가 처음 일반학교에 갔던 날, 교사는 칠판에 오늘의 격언을 적고 학생들에게 전한다. ‘옳음’과 ‘친절’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친절을 선택하라!

대다수 비장애인이 소수의 장애인과 ‘함께’가 아니라 ‘따로’ 살려는 정서가 팽배해 있는 사회에선 어떤 부모도 마음 편히 출산할 수 없을 것이다.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너무나 가혹하기 때문이다. 장애뿐 아니라 성별, 피부색, 출신지, 가족형태, 학력, 성적지향 등으로 차별을 받지 않는 사회일 때, 모든 이가 마음 편히 새 생명을 낳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차별금지법’은 인권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존립과 직결되는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양놈들은 예의도 모르는 것들이야!” 이제 선진국이 되어선지 더 이상 그런 비난을 하는 선생은 없다. 비난의 근거를 채워주던 칼럼도, 버스나 지하철에서 노약자를 위해 자리를 양보하는 모습도 보기 드물어졌다. 대신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일곱번째로 인구 5천만명 이상이면서 1인당 국내총생산 3만달러가 넘는 국가가 되었다. 그런 한국이 만약 유럽 대륙에 있다면 유럽연합에 가입할 수 있을까? 정답은 ‘없다’이다. 유럽연합의 가입 조건은 ‘차별금지법’이 제정된 나라이기 때문에.

노동효(<남미 히피 로드> 저자·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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