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를 벗어나자 기다렸다는 듯 초원이 다가왔다. 시야는 순식간에 초록으로 가득 찼다. 부드럽고 완만한 초원의 선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투명하도록 푸른 하늘가에는 뭉게구름이 걸려 있었다. 초원 너머 호위라도 하듯 늘어선 설산의 이마가 눈부셨다. 드넓은 초원 덕분인지 산들은 위압감을 주지 않았다. 초록색 캔버스 위에 흰 점이 툭툭 찍힌 것처럼 초원 위로 유목민 텐트 유르트가 서 있었다. 모든 화려한 색을 지우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색으로만 채운 세상 같았다. 싱그러운 초록 벌판에서 양 떼와 말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여름은 유목민들이 초원으로 올라와 유르트를 치고 유목 생활을 하며 양이며 말을 살찌우는 계절이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길고 혹독한 겨울을 대비해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하는 시기였다.
카라콜 호수 근처의 알틴 아라샨 트레킹을 위해 설치한 텐트들.
카라콜 호수 근처의 알틴 아라샨 트레킹과 파미르고원의 알라이 계곡 트레킹, 송콜 호수에서 승마 트레킹을 하는 동안 우리는 캠핑을 하기도 했지만 주로 유목민 텐트 유르트에 머물렀다. 이른 아침, 알틴 아라샨 국립공원 입구에서 머리에 스카프를 두른 여인이 소젖을 짜고 있었다. 부드럽게 소를 달래며 손으로 젖을 짜는 모습이 다정했다. 소젖은 송아지를 먹이고 난 뒤에 남는 양만을 취하기. 가축은 들판에서 풀을 먹으며 계절의 많은 시간을 보내기. 오늘까지 키운 양을 잡을 때는 감사하며 경건히 취하기.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원형이 그 땅에는 아직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해발 3500m의 알라콜 호수에서 캠핑을 하던 저녁, 앞 텐트의 키르기스스탄 청년들이 같이 저녁을 먹자며 불렀다. 양고기를 넣고 끓인 국수는 산뜻해서 내 입에도 잘 맞았다. 엔지니어 맥스, 바리스타 아키라, 호텔에서 일하는 찬. 닉네임을 지닌 청년들 중 아키라가 물었다. “한국에서 제일 높은 산은 몇 미터예요?” “1950미터”라는 내 당당한 대답에 웃음이 터졌다. “그건 산이 아니라 언덕이죠.” 7천m급 레닌 피크를 지닌 나라이니 한라산 정도는 낮게 느껴질 수밖에. 키르기스스탄에는 레닌 피크만이 아니라 옐친 피크, 푸틴 피크도 있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 “우린 널린 게 산이라서 그까짓 이름 하나 주는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당신도 저 앞 봉우리 오르고 남희 피크라고 이름 붙여요.” 이들이 쓰는 모자 칼파크는 키르기스스탄의 높고 하얀 산을 뜻한다고 했다. 자신들의 땅에 지닌 자부심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송콜 호수 인근의 유목민이 말젖을 짜고 있다.
키르기스스탄에서는 몸이 불편한 일이 많았다. 합승버스 마르시루트카를 타면 18인승 미니버스에 서른명이 짐짝처럼 실려 가는 일도 예사였다. 비가 내리던 날에는 물이 차 안으로 뚝뚝 떨어져 비닐봉지에 빗물을 받으며 달리기도 했다. 송콜로 승마 트레킹을 하러 가던 날에는 화장실에 다녀오라며 고갯마루에서 차가 섰다. 30분이 지나도록 출발할 기미가 없어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운전기사가 양을 사겠다며 양 장수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차 안에는 양을 실을 자리라고는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 양을 파는 이가 언제 올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일행의 재촉으로 출발했지만, 아내에게 양을 못 샀다고 보고하는 운전사의 전화 목소리가 처량했다. 오랜만에 이런 환경에서 여행을 하니 자꾸 웃음이 났다. 20년 전으로 타임슬립이라도 한 것 같았다. 스마트폰은 자주 무용지물이었다. 스마트폰이 등장한 이후 여행은 두고 온 세계와 다다른 세계 사이를 실시간으로 넘나드는 분열적인 행위가 되었다. 몸은 여기에 있지만, 마음은 저쪽을 향해 끊임없이 신호를 보낸다. 여행은 편리하고 안전해졌지만 어느 쪽에도 온전히 몰입하기 힘들 때가 많았다. 손안의 인터넷 세상이 사라지니 번잡함도 사라졌다.
송콜 호수 인근의 목초지에서 가축들이 물을 마시고 풀을 뜯고 있다.
어디를 가나 늘 지평선이 보였다. 시야를 가리는 고층건물 같은 건 없었다. 산들에 가로막혀 지평선을 볼 수 없고, 공간은 수직적으로만 뚫려 있는 나라에서 온 내게는 경이로웠다. 수평의 열린 공간이 주는 자유로움과 넉넉함이 부럽기도 했다. 이 광활하고 완만한 수평의 선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의 마음과 빽빽한 고층건물의 날카로운 수직선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의 마음이 부디 같기를 바랄 뿐. 팬데믹으로 가용 공간이 더 줄어든 코로나 시기에는 탁 트인 수평 공간에 대한 갈망이 더 커진다. 효율을 극단적으로 추구한 수직 공간에 사는 우리에게는 타인의 공간에 들어서는 일도 쉽지 않다. 유르트에서는 누군가를 만나고 싶으면 초원 위를 좀 걸어가서 문만 두드리면 된다. 겨울은 길고 살림은 빈한하지만, 봄이 오면 가축을 먹일 수 있는 드넓은 땅이 있고, 그 땅에 울타리가 없는 한 삶이 나락으로 떨어질 일도 드물 것이다. 이 나라 사람들에게는 목초지를 공유하는 태도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했다. 자연환경이 훨씬 척박한 타지키스탄 유목민들이 가축을 끌고 국경을 넘어오면 기꺼이 초지를 나눠 쓰는 것도 그런 마음 덕분일 것이다.
빵을 굽던 남자가 화덕에서 막 꺼낸 빵 한 덩이를 건넸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순박했다. 시장의 빵집을 기웃거리니 빵을 굽던 남자가 화덕에서 막 꺼낸 빵 한 덩이를 그냥 건넸다. 그 순간에 그가 지닌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평생 땀 흘려 일하며 선량하게 살아온 삶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세상 떠난 내 아버지 같은 사내였다. 열린 대문 너머의 마당을 들여다보는 내 손을 잡고 끌어들여 빵과 차를 내주는 여인도 있었다. 구글번역기를 돌려 이제 너는 내 친구이고 여기는 네 집이라며 스카프를 선물하던 그녀는 한국에서 일한다는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인사를 시키기도 했다. 들판에서 꼴을 베다가 나와 찍은 사진을 몇번이나 들여다보며 기뻐하던 소년도 있었다. 제 몸보다도 훨씬 큰 낫을 들고 일하며 동생들과 엄마를 챙기던 사피르 알리는 열두살이었다. 초원에서는 어린아이들도 제 몫을 해야 했다. 갓 태어난 새끼를 돌보거나 해 질 무렵 가축을 우리로 몰고 오는 것도 아이들의 일이었다. 당나귀를 탄 어린 소녀나 안장도 없이 말을 달리는 소년의 동작은 자유롭고 거침이 없었다. 유월의 복숭아처럼 볼이 익은 아이들이 초원을 달리는 모습은 그 자체로 초원의 풍경을 완성했다.
유르트 안의 살림은 단출했다. 소똥을 태우는 난로와 한쪽에 가득 쌓인 이불. 바닥에는 양털 카펫이 깔려 있었다. 식사용 좌탁이 있는 유르트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천 위에 상이 차려졌다. 영어는 통하지 않았지만 필요한 건 서로 다 알아들었다. 송콜에서 머물렀던 유르트 앞에는 작은 태양열 전지판이 놓여 있었다. 스마트폰으로 손님 예약을 받으니 그럴 수밖에. 유르트 앞에는 어디에나 이동식 간이 세면대가 있었다. 꼭지를 돌리면 물이 쫄쫄 떨어졌다. 깨끗한 물은 귀하기만 해서 우리는 고양이 세수와 양치질만 겨우 할 수 있었다.
유르트 안에서 식사를 마치고 카드놀이를 하고 있는 트레커들.
유르트에서의 식사도 살림만큼이나 단순했다. 양고기가 들어간 볶음밥 플로브 혹은 양고기 국수 라그만. 양고기와 양파를 넣은 만두 만티. 채식하는 이에게는 요구르트 아이란과 보리나 메밀이 듬성듬성 섞인 감자밥 정도가 차와 함께 나왔다. 소박한 밥상이지만 늘 입에 맞았다. 육식주의자인 친구는 자신이 먹어본 양고기 중에 이 나라의 고기가 가장 부드럽고 맛있다고 했다.
유목민들은 이별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문명의 편리함과 몇달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헤어질 줄 알고, 유르트를 찾는 이들을 환대하지만 떠나는 이들에게 집착하지도 않았다. 생명을 귀히 여겼지만 그 생명을 취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일에 망설임이 없었다. 지닌 것을 이웃과 나누는 일에도 인색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손님을 환대하는 풍습이 살아 있어 누가 와도 차와 간식을 내놓고는 했다. 큰 죄를 짓는 일도 없이, 허망한 욕망에 좌절하는 일도 없이, 어제와 다름없는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었다. 그 땅에서 삶은 단순했다. 때에 맞춰 양을 몰고 나가 풀어놓고, 온 가족이 모여 꼴을 벴다. 들판에 살구나 버찌가 여무는 계절이 오면 따서 잼을 만들었다. 술 한잔이 생각나면 양동이를 들고 나가 말의 젖을 짜 크므즈(쿠미스)를 만든다. 매일 먹는 치즈와 요구르트는 염소와 양의 젖을 발효시켜 만든다. 겨울이 오면 가축에게 쌓아둔 건초를 먹이며 봄을 기다렸다. 가축에게 먹일 물과 풀이 있는 한 삶은 풍족하다고 여겼다. 이 삶의 양식을 일년에 석달만이라도 이어가며 사는 한, 성정이 모질고 강퍅해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이 삶조차 머지않아 박물관의 유물로나 남게 될까. 아마도 그렇게 될 것이다. 유목민의 아이들 중 장래 희망이 목동이나 양치기인 아이는 없을 테니까. 피할 수 없는 신탁처럼 예고된 그 변화를 상상하면 괜히 목이 메었다.
고도가 높은 초원은 8월인데도 밤이 되면 기온이 떨어졌다. 저녁을 먹고 나면 유르트의 주인은 난로에 소똥을 넣고 불을 지폈다. 잘 마른 소똥은 냄새도 없이 유르트를 따뜻하게 데웠다. 유목민들의 텐트에서는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자야 했다. 낯선 이들과 뒤섞인 채 일년에 한번 빨 요 위에 침낭을 덮고 누워 있으면, 새삼 너무 많은 것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끌어안은 양과 말, 내가 놓지 못하는 떠도는 삶에 대한 욕망. 결국 우리는 각자에게 절실한 것을 붙잡고 생을 건너가는 중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꿈도 없는 잠에 빠져들고는 했다.
지금쯤 그 땅에도 봄이 찾아와 초원을 덮었던 눈이 녹기 시작했을까. 곧 새 풀이 돋아나고, 그 풀이 자라 초원을 뒤덮고, 바람이 순해지는 유월이 오리라. 유월이 오면 유목민들은 다시 양과 말을 끌고 초원으로 나가 유르트를 칠 것이다. 강과 초원에 기대어 목숨을 맡길 것이다. 먼 조상들이 그랬듯이.
글·사진 김남희 여행가
여행가 김남희는 2003년 이후 유목민의 삶을 살아오고 있다. 언젠가는 앉아서 유목하는 경지에 오르기를 바라면서. 지은 책으로는 <길 위에서 읽는 시> <여행할 땐, 책> <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 등이 있다. 4주에 한번 ‘김남희의 걷다 보면’을 통해 ESC 독자와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