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를 마친 뒤 산티아고 대성당을 바라보는 순례자들. 김남희 제공
‘눈물의 볶음밥 사건’이 일어난 그날은 먼저 도착한 막내가 식당을 골랐다. 포르투갈 전통 식당이었다. 열명의 테이블 세팅을 끝내고 자리에 앉은 순간, 제이(J) 샘이 근처 일식집에서 볶음밥을 먹으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안 된다고 하면 안 된다’는 걸 알 정도의 지각은 있었다. 가서 드시라고 하니 네명이 우르르 일어나 나갔다. 그 순간 밀려드는 서운함의 파도에 나는 거의 익사할 뻔했다. 이제 사흘째인데 볶음밥을 찾는 일도, 이미 들어간 식당에서 일어나 나가는 일도 서운했다. 볶음밥 한 그릇에 그토록 격한 감정이 밀려들다니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다음날 제이 샘이 넌지시 물었다. 어제 “볶음밥 때문에 서운하셨어요?” 그 말에 병아리 눈곱만큼의 눈물이 찔끔 났다. 서운했다고 이실직고하는 순간, 서운함은 눈물에 휩쓸려 사라졌다. 여행지에서 음식만큼은 주는 대로 잘 먹으며 다니다 보니, 입이 짧은 분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에 미숙했다.
비에도 지지 않고 걷는 순례자들. 김남희 제공
모자의 기적과 운명의 남자
다음날은 숲이 길게 이어져 발이 편했다. 그 숲길에서 유아차를 끌고 걷는 여성 순례자와 마주쳤다. 유아차에는 이제 돌이 지났을 아이가 타고 있었다. 포르투갈 길은 비교적 평탄한 길이지만 이런 숲에서 유아차를 끌며 걷다니! 그가 감수해야 하는 순례길의 고단함을 상상하니 내가 멘 배낭의 무게가 가볍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이 길의 끝에서 그가 마주할 환희의 밀도는 내 것보다 더 단단할 것이다. 카미노에서는 ‘노 페인 노 글로리’(No pain No Glory, 고통 없이 영광 없다)가 진리일뿐더러 고통이 클수록 영광도 크다고 믿으니까. 우리가 건넨 초콜릿을 그는 미소와 함께 받았다. 그는 다른 순례자들의 도움을 받아 가며 산티아고까지 무사히 걸어갈 것이다. 카미노에서는 작은 기적이 늘 일어나곤 하니까. 우리 역시 그런 기적의 수혜자였다.
케이(K) 샘이 숲길에 핀 칼라꽃을 들여다보다가 모자를 잃어버렸다. 이틀간 모자 없이 걸었던 그가 마을의 알베르게(산티아고 순례길에 있는 숙박 공간을 일컫는 말)에 들어섰을 때였다. 네덜란드 여성 파올라가 “혹시 이 모자 주인 있나요?” 하며 나타났다. 그는 순례자가 잃어버린 모자라고 생각해 들고 다니며 주인을 찾고 있었다. 사흘 만에 모자는 주인에게로 돌아왔다.
‘운명의 남자’를 만난 건 모자의 기적이 일어난 다음날이었다. 유니폼을 입은 선한 인상의 남자였다. 전날에도 그를 본 기억이 있었다. 서로 눈이 마주친 순간, 말을 걸었다. “우리 전에 만난 적 있지 않아요?” 완벽하게 구태의연한 멘트였다. 그가 우리가 마주쳤을 법한 마을 이름 몇개를 댔다. 그는 미국인 단체 순례자를 위한 차량의 운전기사였다. 걷다가 지친 이들이 합류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순간에 그를 마주친 거였다. 제이 샘이 갑자기 뒤에서 외쳤다. “전화번호 받아놔요. 나 70살 여행 때 필요할지도 모르잖아요.” 올해 환갑인 그가 일흔살이 되면 ‘방과후 산책단’ 10주년 기념을 겸해 또 카미노를 걷자는 이야기를 한 터였다. 그에게 전화번호를 달라고 한 순간, 그의 얼굴이 붉은 꽃처럼 피어올랐다. 당황한 얼굴로 종이와 펜을 찾으러 가던 그가 돌아와 내게 되물었다. “혹시 당신이 달라는 번호가 회사 번호인가요?” “당연하죠. 뭘 생각한 건가요?” 순간 우리를 지켜보던 모두의 웃음이 터졌다. 혼자 엉뚱한 생각을 했던 그가 얼굴이 붉어진 채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실컷 웃고 난 그날 나는 에스엔에스(SNS)에 운명의 남자를 만났다는 글을 올렸다. 물론 진실은 과감히 생략했다.
산티아고까지 100㎞를 남겨둔 모스 마을에 들어서니 갑자기 순례자들이 많아졌다. 순례 증서 콤포스텔라를 받을 수 있는 최소 거리가 100㎞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부터 시작되는 엄청난 혼잡 때문에 ‘100㎞’ 증서제에 대한 불만이 꾸준히 제기되지만 아직 변한 건 없다. 우리는 어느새 8일을 걸었고 나흘을 남겨두고 있었다. 다들 발에 물집이 서너개 이상 잡히고 무릎이나 허리가 쑤시고 짐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그래도 좋았다. 드라마 대사처럼 ‘날이 맑아서 좋았고 날이 흐려서 좋았고 모든 날이 다 좋았다.’
카미노에는 일종의 ‘유사 신분제’가 있다. 그 신분은 어디서부터 걸어왔느냐로 정해진다. 프랑스 길을 예로 들자면 대부분 “생장에서부터”라고 답한다. 그런 순간에 “우리 집에서부터”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집이 어디냐고 되물으면, 파리나 베를린이라고 아주 ‘쿨’한 태도로 답한다. 그 순간 그들의 어깨가 살짝 올라간 것처럼 보이는 건 분명 내 노안 탓일 거다. 카미노에서는 더 먼 길을 걸어올수록 더 존경받는다. 육체의 고통이 심할수록 입성이 허름해질수록 돈을 덜 쓸수록 진정한 순례자가 된 듯 착각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무의식적인 구별 짓기로 이어진다. 배낭을 메고 걷고 시설이 열악한 공립 알베르게에서 자는 다수의 순례자.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진짜 순례자’와 ‘가짜 순례자’를 구별 짓는다. 배낭 배송 서비스를 이용하거나 펜션에서 자는 순례자에 대한 은근한 폄하.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카미노를 걷는다”고 하면서도 그런 마음에서 자유롭기가 쉽지 않다. 나 또한 카미노를 걸을 때마다 스스로를 경계해야 했다. 이번 카미노에서는 아주 제대로 망했다. 우리 산책단원 모두가 내 기준의 “진짜 순례자”가 되기를 바라느라 혼자 애를 끓였으니.
“체력이 인성”이라는 말
나는 카미노에서 모두가 평등하기를 원했다. 젊어도 힘든 건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침대 배정을 ‘사다리 타기’나 ‘가위바위보’, ‘데덴찌’(손등과 손바닥을 내밀어 편가르는 방법)로 정하며 나름 공정을 기했다. 시간이 갈수록 귀찮은 일(카페에서 그릇을 나른다거나 빨래를 모아 세탁기에 넣고 돌리는 일 등)은 자연스레 젊은 친구들의 몫이 되었다. 체력 덕분에 타인을 위해 쓸 에너지가 남은 그들은 그런 일을 기꺼이 도맡았다. “체력이 인성”이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게 고맙고 미안한 언니들은 그들에게 물질로 보상하곤 했다. 양쪽 모두 괜찮아 보였다. 지켜보는 나만 불편할 뿐. 내가 생각하는 ‘진짜 순례자’는 고통조차 묵묵히 견디며, 불편함은 아무렇지 않게 감수하며, 매사에 감사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고통에 먼저 집중하는 모습이 서운했고, 사소한 불만이라도 들리면 귀에 콕 박혔다. 모두가 경계 없이 어울리며 스스럼없는 친구가 되기를 바랐지만 그 또한 불가능했다. 함께 온 사람들은 끝까지 함께였고, 나이에 따라 그룹이 나뉘었다. 그 자연스러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해 속이 탔다. 한마디로 나는 그릇이 작은 리더였다. 소심하고 쪼잔하고 뒤끝 있는 리더.
그래도 카미노는 카미노. 어떤 이라도 ‘순례자’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스밀 수 있는 곳이었다. 체력이 달려 꼴찌를 도맡는 제이 샘과 엔(N) 샘도, 늘 앞에서 가볍게 걷는 와이(Y) 샘도, 빨래를 도맡아 ‘빨래방 소녀들’이라는 별명을 얻은 막내들도, 가장 작은 체구로 언제나 묵묵히 걷는 케이 샘도 서로에게 점점 정이 들며 물들어갔다. 25㎞를 걸어 산티아고에 들어선 마지막 날은 구름 한점 없이 청명했다. 대성당 앞 광장에 도착한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끌어안으며 눈물을 훔쳤다. 광장에는 기념사진을 찍거나 서로를 끌어안은 순례자들이 가득했다. 그곳은 삶에 지친 이들의 쉼터이자 해방구였다. 관광객과 순례자 누구도 마스크를 쓰지 않아 코로나19 시대조차 지나간 것 같았다.
콤포스텔라를 받으러 찾아간 순례자협회의 뒷마당에는 동백이 지고 있었다. 우리는 붉은 동백꽃 위에 증서를 올려놓고 ‘인증샷’을 찍었다. 알베르게로 향하는 길에서 카미노가 처음인 막내들은 원피스와 구두를 사야 하나 심각하게 티피오(TPO, 시간·장소·상황)를 고민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그날 저녁에 갈리시아 관광청에서 일하는 카르멘의 저녁 초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카미노를 한국에 알렸다는 공로로 갈리시아 정부로부터 상을 받을 때, 서울의 스페인 대사관에서 그를 처음 만나 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약속 장소로 등산복에 등산화를 신고 진군했다. 이 도시에서는 오성급 호텔에 그런 복장으로 들어가는 일 정도는 기본이었다. 다음날 오전에는 카미노 총괄 책임자인 세실리아가 모두를 관광청으로 초대했다. 세실리아는 순례자가 오지 않는 지난 2년이 너무나 외롭고 끔찍했다고 했다. “너희가 올해 처음 온 한국인 순례자는 아니지만, 우리에겐 마치 희망의 소식 같아. 정말로 고마워. 다시 산티아고를 찾아줘서”라며 기쁨을 격렬히 표현했다. 그날 관광청은 대성당 가이드 투어까지 준비해줘서 모두에게 특별한 추억을 선물했다.
저마다의 순례길 추억을 산티아고의 상징인 가리비 껍데기에 남겼다. 김남희 제공
산티아고의 대성당 앞에 놓은 순례자들의 신발. 오진향 제공
“너무 잘 먹고 잘 잔 럭셔리 순례길”
우리는 함께 걸었지만 카미노의 추억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엔 샘은 발목에 작은 조가비 문양을 새김으로써 카미노를 몸에 남겼다. 심한 다리 통증으로 하루는 혼자 택시로 이동해야 했던 제이 샘은 눈물 어린 길로 기억하게 될까. 이(E) 샘은 그의 말처럼 “검소하고 청빈한 순례길을 상상했는데 너무 잘 먹고 잘 잔 럭셔리 순례길”로 추억할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는 ‘반성의 카미노’가 되지 않을까. 혼자 걷는 것과 산책단을 꾸려 단장으로 걷는 일은 완전히 달랐다. 각자의 체력이 다르고 카미노에 대한 기대와 이해가 달랐다. 그런 아홉명을 부드럽게 이끌기에는 내 품이 작았다. 내 옹졸함에 흠칫흠칫 놀라야 했다. 반성은 제대로 한 것 같으니 더는 좌절하지 않으련다. 다음에는 좀 더 잘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삶이라는 순례길을 걸어갈 것이다. 카미노가 매번 내게 준 선물은 어떤 나라도 사랑하게 만드는 힘이었기에.
5월의 산티아고에는 이미 순례자와 여행자가 가득했다. 미사가 열리는 대성당에는 앉을 자리가 부족했다. 저녁이면 광장에서 악단 라투나 청년들이 음악을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다. 순례자들이 그 곁에서 흥겹게 춤을 추었다. 그리웠던 풍경들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다시 순례자가 되어 이 도시의 광장에 서다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팬데믹 시기를 외롭고 고단하게 건너온 우리 모두에게 잘 버텨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고팠다.
산티아고에서 사흘을 보낸 우리는 귀국을 위해 마드리드로 향했다. 그때만 해도 몰랐다. 내 귀국은 아직 허락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김남희 여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