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커버스토리] 격조와 궁상 사이―40대의 해외 배낭여행
‘불혹 뒤 지천명 이전’ 말레이시아로 불쑥 떠난 보름간의 백패킹
질긴 피지배의 역사 거쳐 인종·종교·언어·음식 뒤섞인 멜팅포트
도시와 자연의 공존…다음엔 ‘타만 느가라’ 우림 여행 꿈꾸며
‘불혹 뒤 지천명 이전’ 말레이시아로 불쑥 떠난 보름간의 백패킹
질긴 피지배의 역사 거쳐 인종·종교·언어·음식 뒤섞인 멜팅포트
도시와 자연의 공존…다음엔 ‘타만 느가라’ 우림 여행 꿈꾸며
트렝가누 카파스섬. 나무에 걸린, 주인 없는 해먹.
용광로 속 다채로움 지닌 나라 말레이시아의 두 표지로, 수세기 이식배양된 혼종, 더 오래 자생한 호의의 생태를 거칠게나마 꼽아본다. 인종, 종교, 언어, 음식, 도시와 자연이 이처럼 뒤섞인 나라는 미국 말고 없지 싶다. 다양성의 스펙트럼이 한끼 5~7링깃(1500~2100원)에서 50~100링깃 밥값처럼 넓고, 유명도시 페낭의 성당, 교회, 절, 모스크, 힌두 사원이 줄지어 제각기 수백년 삶을 보듬었을 조지타운의 한 반경(부둣가에 도교 사원도 있다)처럼 조밀하다. 3개국에 발이 닿는 여행자처럼 아침 중국식을 먹고, 점심 인도, 저녁 말레이 음식을 먹었다. 장이 미처 놀랄 새 없었고, 할랄·비건 식당은 흔했다. “우린 먹는 데 별로 아끼지 않아”라는 이 나라 여러 사람의 말은 저 많은 문화와 규범에서 합일된 삶의 근원을 독송하고 함께 위안받는 일이리라. 무엇이 말레이인다움(Malayness)인가 결결이 합의되기 어려워도 “두리안은 우리 게 최고야, 태국(타이) 걔네 아니라니까.” 미국의 멜팅포트(다문화)가 이주인들의 개척시대에서 비롯한다면, 말레이시아에선 질긴 피지배사를 복기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은 적의 없고 나긋하다. 관광국가라서? 아니, 상술도 호객도 못 봤다. 2주 동안 위협이나 불쾌감을 경험 못 했는데, 하루 다섯번을 신에게 기도하는 모로코에서의 2019년 험궂은, 특히 도시 페스(Fez)의 5월이 공연히 되씹혔다.
믈라카. 크라이스트 처치 앞. 18세기 네덜란드 식민 시절 지어진 영국 성공회 소속 교회. 네덜란드에서 가져온 벽돌로 만들어졌다.
지난 6월3일 쿠알라룸푸르의 잘란 알로르 야시장. 음식, 문화, 언어가 뒤섞인다. 도시는 유명 야시장만 다 보려 해도 며칠을 요구한다.
쿠알라룸푸르. 프탈링 야시장에서 지역민들에게 인기 많은 중국식당. 1920년대 문을 연 ‘김리안기’.
쿠알라룸푸르. 브릭필즈 일대 지역민에게 유명한 인도식당(비샬 푸드 앤드 케이터링). 바나나잎에 주문한 음식을 담아 먹는다. 맛이 없으면 식사 뒤 바나나잎을 아래에서 위로 접는다.
투어와 트래블 사이에서 주석 채굴로 파인 데마다 흙탕물이었다는 쿠알라룸푸르(‘두 물길의 합+진흙’이라는 뜻)는 이제 쇼핑몰과 마천루로 가득한 국제도시다. 1970년대 한국보다 경제지표가 좋았던 국가의 오늘날 상징물인 페트로나스 트윈타워를 한·일 건설사가 한 동씩 짓고, 두 동을 또다른 한국 기업이 연결(스카이브리지)했다는 사실은 사진 찍는 한국인들을 한번 더 붙잡고, 타워와 케이엘시시(KLCC) 공원 사이 밤의 분수쇼는 누구든 15분씩 사로잡는다. 휘황한 도시는 ‘투어’(관광)에 충분하다. ‘트래블’(여행)은 도시의 손때로 비로소 꽉 찬다. 음영의 자취랄까. 호황의 쇼핑몰과 불황의 쇼핑몰(가령 부킷빈탕의 숭아이 왕 플라자)의 대비, 21세기 ‘고급주택촌’ 건너 반세기 낡은 ‘신촌’(新村) 등등 사연과 쟁점에 아득해질 때, ‘관광상품’으로 소개되기 전인 도시혁신 실험들을 보아 기뻤다. 1940년대 극장(RexKL)을 서점·공연장 등 문화예술 허브(2021년 11월 개관)로, 110년 넘은 한때 세계 최대의 기차정비소(Sentul Depot)를 푸드코트로 개조한 곳(2021년 11월)들과 이들 공간에 숨을 불어넣는 남녀노소들. 한 온라인 서점이 조호르 등 큰 도시들에 카페·식당·전시관 기능까지 담아 예술적으로 조성 중인 오프라인 서점들은 관광벨트가 될지도 모르겠다. 다만 “도대체 책 사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유지되지?” 17만권을 소장했다는, 쿠알라룸푸르 마이타운 쇼핑센터 내 서점에서 헤세의 책 한권이 없대서 천장만 보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마르케스, 5400원)을 발견하고 환호한 내게, 룸푸르(진흙)빛으로 지인이 한 말이다. “네가 오늘 유일하게 책 산 사람일 거야.”
쿠알라룸푸르. 1940년대 극장을 서점·공연장 등을 갖춘 문화허브로 재개관했다. 화재 흔적도 건물벽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트렝가누 카파스섬의 석양. 바다 건너 뭍에선 천둥번개가 쳤다.
언젠가 말레이 정글 여행을… 이슬람예술박물관의 위엄과 세련미는 국립박물관을 압도했다. 독립 전후 중국·인도계의 영향력을 견제하며, 말레이인의 정체성을 이슬람과 말레이어에 두어 통합 균형을 꾀해온 국가의 속내를 보는 듯했다. 하지만 ‘통합’이 비빔밥 한상 차리는 일일까. 화인이 거주국에 가장 동화되지 않은 동남아 국가로 말레이시아가 꼽히는 게 현실이다. 트렝가누는 초기 중국 이주민이 적어 말레이인과 가장 유연히 섞인 곳이다. 반면 상권을 지배하는 큰 도시의 중국계 다수는 말레이어를 하지 않는다. 개인의 선악이 자리할 수 있을까. 공산주의자의 세력화를 막기 위해 영국이 1950년대 40만명의 중국인들을 강제로 몰아넣어 게토화한 거주지가 곳곳의 신촌이다. 당시 군경에 통제되던 마을 건너엔 바투 고급주택단지가 들어서 저들끼리 외부 출입을 막고 있다. 때로 22시간 통행이 금지되고, 굶주림과 죽음에 내몰린 신촌은 ‘발 없는 새’의 쉴 수 없는 운명이 강요된 모진 과거형이되 애면글면 길을 내고 이어온 ‘족적들’의 더 질긴 진행형이다. 이제 젊은이들은 독립을 기념한 므르데카 광장, 전세계 가장 높이서 휘날린다는 국기 아래 연애하고, 킥보드 타고, 웨딩촬영 한다. 히잡 밖으로 마스크, 헤드폰을 끼고 춤춘다. 데사 파크시티에선 세상의 모든 개가 뛰어놀고, 수방자야에선 사방 영어가 들려왔다. <발 없는 새>는 동아시아가 나눠진 파괴적 운명을 소재로 했다. 하지만 결국 땅을 딛고 걷는 인간, 연이 없을 법한 길과 길이 만나 새 길을 내는 풍경이기도 하다. 말레이시아도 아시아의 그 길에 서 있다. 상반기 아주 고됐다. 새삼 묻진 말자. 오늘의 거처에서 내일 길이 시작되는 거다. 난관은 또, 또또 있을 테지, 그땐 정말 타만 느가라 깊은 우림으로 들어가보고 싶다.
현지인 인터뷰로 보는 여행정보
“뇨냐 식단과 락사, 꼭 먹어보길” ―자기소개 및 한국과의 인연?
“쿠알라룸푸르 사는 탄(Tan). 건축가다. 오래전 서울·부산을 여행했다. 몇년 전 유럽에서 석사를 마쳤는데, 기숙사 옆방 (한국인) 동기가, 난 별로 술 안 좋아했는데, 자주 들고 왔다.” ―(화제 바꿔) 꼭 가봐야 할 두 곳만 꼽는다면?
“식민, 중국인 거주 역사와 문화 다양성의 페낭. 바다·산이 어우러진 코타키나발루.” ―필수 음식 두 가지는?
“말레이시아 식재료에 중국 조리법이 더해져 이주 초기에 자리잡은 뇨냐 식단, 그리고 락사(시큼한 국물요리). 지역마다 재료가 달라 어떤 지역은 아예 다른 음식이 된다.” ―쿠알라룸푸르는 걷기 좋지 않다. 인도가 미비하다.
“차 중심이다. 덥기도 하고. (진행 차선은 영국처럼 왼쪽, 횡단 때 조심해야). 대부분 그랩(Grab) 사용한다. 우버는 없다.” ―유심은 뭐가 좋을까?
“디지(Digi)통신이 전국에서 가장 잘 터진다.”(실제 공항 쇼핑몰 내 상품 중 가격도 가장 저렴했다. 한달짜리 무제한이 35링깃이었다.) ―싱가포르도 가보았나?
“많이. 공항세도 비싸 싱가포르인조차 조호르바루(말레이시아 인접 도시, 스나이공항이 있다)에서 다른 나라로 간다.”(1965년까지 말레이시아였던 싱가포르에 15시간 경유하며 명소를 둘러보았다. 창이공항 터미널3에 24시간 짐 보관소가 있다. 경유시간이 짧다면 낮 보타닉 가든, 밤 가든스 바이 더 베이를 가겠다. 말레이시아는 자연을 가졌고, 싱가포르는 자연을 만들었다.) 추신: 안전 등 여행 경험은 처지마다 다를 수 있겠습니다. 메일로 여행 질문 주시면 더 자세히 답해보겠습니다.
“뇨냐 식단과 락사, 꼭 먹어보길” ―자기소개 및 한국과의 인연?
“쿠알라룸푸르 사는 탄(Tan). 건축가다. 오래전 서울·부산을 여행했다. 몇년 전 유럽에서 석사를 마쳤는데, 기숙사 옆방 (한국인) 동기가, 난 별로 술 안 좋아했는데, 자주 들고 왔다.” ―(화제 바꿔) 꼭 가봐야 할 두 곳만 꼽는다면?
“식민, 중국인 거주 역사와 문화 다양성의 페낭. 바다·산이 어우러진 코타키나발루.” ―필수 음식 두 가지는?
“말레이시아 식재료에 중국 조리법이 더해져 이주 초기에 자리잡은 뇨냐 식단, 그리고 락사(시큼한 국물요리). 지역마다 재료가 달라 어떤 지역은 아예 다른 음식이 된다.” ―쿠알라룸푸르는 걷기 좋지 않다. 인도가 미비하다.
“차 중심이다. 덥기도 하고. (진행 차선은 영국처럼 왼쪽, 횡단 때 조심해야). 대부분 그랩(Grab) 사용한다. 우버는 없다.” ―유심은 뭐가 좋을까?
“디지(Digi)통신이 전국에서 가장 잘 터진다.”(실제 공항 쇼핑몰 내 상품 중 가격도 가장 저렴했다. 한달짜리 무제한이 35링깃이었다.) ―싱가포르도 가보았나?
“많이. 공항세도 비싸 싱가포르인조차 조호르바루(말레이시아 인접 도시, 스나이공항이 있다)에서 다른 나라로 간다.”(1965년까지 말레이시아였던 싱가포르에 15시간 경유하며 명소를 둘러보았다. 창이공항 터미널3에 24시간 짐 보관소가 있다. 경유시간이 짧다면 낮 보타닉 가든, 밤 가든스 바이 더 베이를 가겠다. 말레이시아는 자연을 가졌고, 싱가포르는 자연을 만들었다.) 추신: 안전 등 여행 경험은 처지마다 다를 수 있겠습니다. 메일로 여행 질문 주시면 더 자세히 답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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