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비아 메데인에 있는 미술관 앞 보테로 작품에 앉아 쉬는 아이들. 노동효 제공
20세기 가장 유명한 미술가를 꼽으라면, 저마다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파블로 피카소라고 하면 대부분 수긍할 것이다. 생존하는 가장 유명 미술가를 꼽으라면? 물망에 오를 작가는 여럿이지만 페르난도 보테로를 대면 많은 이가 수긍할 것이다. 일단 작품 가격으로만 드로잉 한점에 1억, 유화는 20억, 조각품은 50억원에 이른다. 이토록 창창할 미래를 70년 전 미리 알아본 콜롬비아의 고등학교는 아버지를 여읜 후 신문 삽화로 생활비를 벌며 학업을 이어가던 그를 퇴학시켰다. 자고로 제도교육의 ‘숨은 목적’이란 탁월한 작가나 뛰어난 예술가의 탄생에 이바지하는 게 아니던가! 보테로가 쓴 신문사 기고문에서 ‘큐비즘은 현대사회에서 개인성의 파괴를 반영한다’는 내용이 공산주의자들과 닮았다는 게 이유였다. 썩은 사과가 싱싱한 사과까지 물들일 수 있다나? 매카시즘에 빠진 교장 덕분에 보테로는 한결 빨리 고향을 떠날 수 있었다. 그 후 인생은 조지프 캠벨이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 그린 영웅행로, 그대로다. 일단 집을 떠난다. 고난을 겪는다. 보물(깨달음)을 얻고 귀환한다.
보고타에서 회화 실력을 인정받은 보테로는 화집으로만 접한 거장의 작품을 보고 배우기 위해 유럽으로 떠났다. 그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고전 미술을 배우고 현대미술을 체감한 후 고국으로 돌아와 잠깐 머물곤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멕시코로, 미국으로!
보테로 작품을 배경으로 가족사진을 찍는 나들이객. 노동효 제공
어느덧 1963년,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다빈치 전시회’가 열렸다. 프랑스 바깥으로 처음 반출된 <모나리자> 얘기로 뉴욕이 떠들썩했다. 그때 현대미술관에 또 다른 모나리자가 걸렸다. <12살의 모나리자>. 보테로의 이름을 알리게 된 일대 사건이었다. 그 후 뚱뚱한 인물과 뚱뚱한 동물과 뚱뚱한 사물이 자아내는 독특한 분위기에 매료된 이들이 점점 늘어났다. 보테로는 유명해졌다. 그러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유럽이 더 편안하다고 말하자 아내가 물었다. “그럼 이사 갈까?”
유럽에서 보테로는 조각가로서 또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동안 그린 인물과 사물을 입체로 구현한 작품이었다. 볼륨이 즉각 느껴지는 조각은 그의 명성을 더 높였다. 파리시는 처음으로 샹젤리제 거리를 생존 작가의 전시장으로 내주었다. 보테로는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가가 되었다. 프랑스, 영국, 스위스 등 유럽뿐 아니라 싱가포르, 일본, 미국까지 보테로 작품을 사들이면서 작품 가치는 점점 더 올랐다. 보테로는 작품을 판 돈으론 피카소, 샤갈, 미로 등 거장의 작품을 사들였다. 그러곤 200점 넘는 본인 작품까지 보태어 고국에 기증했다. 변변한 미술관 하나 없었기에 유럽으로 그림을 공부하러 갔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발만 봐도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오게 하는 보테로의 작품. 노동효 제공
한국에서도 ‘페르난도 보테로 전’이 열린 적이 있다. 운반이 쉬운 회화 위주였다. 대형 조각작품을 전시하려면 배송료 또한 만만치 않다. 결국 가장 유명한 생존 미술가의 대작을 감상하려면 전시 장소로 직접 가야 한다. 그래서 콜롬비아로 갔다. 두번째 방문이었다. 첫 방문 땐 여유가 없었다. 남미 여행 중 강도들에게 가진 걸 다 털린 후 떠돌이 서커스단에 합류해 유랑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두번째 방문은 아내와 함께였다. 우리는 콜롬비아 서북부 메데인에 도착한 다음날 지하철을 타고 보테로광장으로 갔다.
경이로웠다. 23점의 작품이 광장과 거리에 놓여 있었다. 게다가 무료였다. “많은 사람이 찾을지라도 미술관은 엘리트를 위한 곳이다. 거리에 작품을 설치하면 모든 사람이 감동받을 수 있다.” 보테로의 지론이었다. 그는 처음 11점을 광장에 전시하기로 했다. 그리고 장소를 본 후 기증할 작품 수를 더 늘렸다. 위치, 높이, 방향까지 세심하게 조언했다. 원칙은, 아이들이 쉽게 올라타고 누구든지 만질 수 있도록!
아내는 콜롬비아에 온 이래 가장 행복해 보였다. 연신 웃음을 터트렸고, 몸에 비해 턱없이 작은 발이 앙증맞다며 쓰다듬었다. 다른 관람객처럼 작품 위에 올라가지는 않았다. 한국인에겐 익숙하지 않은 행동이었으니까. 다른 이들은 작품 머리에 앉고, 엉덩이 위에 서고, 배 위에 엎드린 채 사진을 찍었다. 한국에서라면 ‘거장의 작품을 함부로 대한다’고 역정 내는 이가 많았을 테지만, 누구 하나 제지하지 않았다. 그런다고 해서 보테로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진정한 권위란 두려움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니까. 보테로광장은 21세기에 만들어진 최고의 광장이었다.
아이들이 오를 수 있는 기단에 세운 보테로의 작품 <말>. 노동효 제공
실내 전시품을 보기 위해 안티오키아미술관으로 들어갔다. 내국인 무료, 외국인 유료였다. 보테로광장이 생기기 전까지 외국인의 메데인 방문은 극히 드물었다. 마약과 폭력과 암살자로 악명 높은 도시였으니까. 볼 것 없이 위험천만한 도시에 갈 이유가 없었다. 마약왕은 죽었고 보테로 작품과 더불어 도시는 변모했다. 보테로 작품과 컬렉션을 감상하기 위해 메데인으로 날아와 기꺼이 관람료를 냈다. 관람료는 콜롬비아의 젊은 화가를 지원하는 데 사용되었다. 보테로는 말해왔더랬다.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할 수 있는 한 다 해야지.’
안티오키아미술관에 전시된 보테로 작품 <손>. 노동효 제공
실내엔 더 많은 작품이 있었다. 가장 눈에 띈 것은 〈만돌린〉이었다. 보테로는 일찍부터 르네상스 미술의 풍만함에 이끌렸지만, 자신만의 확고한 스타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느 날 만돌린을 그리던 중 가운데 구멍을 실제보다 훨씬 작게 그렸다. 순간 만돌린이 폭발하듯 부풀어 올랐다. ‘볼륨의 비밀’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유레카!
그리스 시대부터 황금비율이 존재했다. 유클리드 이전부터 대략 1 대 1.6(플러스마이너스 알파) 비율로 건축, 조각, 그림이 제작되었고, 지금도 인간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작품은 이 정도 비율을 따른다. 그러나 보테로의 인물, 동물, 과일은 판이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름다움’에 더해 ‘즐거움’까지 느낀다. 보테로는 엉뚱한 지점에서 튀어나와 기존의 미술을 전복했다. 물론 미술의 최전선에 있는 작가가 아니라고, 대중에 영합하여 예술의 하향 평준화에 기여하는 작가라고 비난하는 비평가도 있다. 내 곁에 있다면 작품을 만지고, 올라타고, 기대어 ‘웃음 터트리는 사람들’을 먼저 보라고 권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최애’ 예술가는 찰리 채플린인데 여행길에서의 경험 때문이다. 아프리카 외딴 마을에서였다. 식당에 낡은 텔레비전이 있었다. 현지인들이 자지러지듯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브라운관을 바라보았다. 채플린이 만든 무성영화였다. 순간 기시감에 휩싸였다. 라오스 산골에서였다. 그나마 좀 사는 집에 방을 빌려 하룻밤 묵기로 했다. 밤이 되자 텔레비전을 보러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쉴 새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채플린이었다! 유사 이래 채플린만큼 ‘인류를 행복하게 한 예술가’가 있었던가? 보테로를 ‘남미의 피카소’ ‘색채의 마술사’ 등 여러 별명으로 부른다. 나는 보테로를 ‘미술계의 채플린’이라고 부르고 싶다.
페르난도 보테로가 기증한 작품들로 인해 관광도시로 변모 중인 메데인. 노동효 제공
보테로의 작품은 웃게 하지만 모든 작품이 그런 건 아니다. 2004년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에서 미군에 의해 자행된 포로 학대가 세상에 알려졌다. 보테로는 이를 소재로 그림을 그리고 전시한 후 미국 대학에 기증했다. 안티오키아미술관에도 웃지 못할 그림이 있었다, 〈에스코바르의 죽음〉. 메데인을 ‘보테로의 고향’보다 ‘마약왕이 활동했던 도시’로 기억하는 이가 더 많다. 많은 미디어가 에스코바르에 관한 이야기를 소재로 삼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정치인으로 나섰을 때 현지 반응 정도만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겠다. 마약을 팔아 세계 10대 재산가가 된 그가 하원의원이 되었을 때 대통령까지 되길 바라는 시민도 있었다. 거대 양당이 적대적 공생관계를 통해 소수정당이 끼어들 수 없는 이너서클을 형성했는데, 그나마 에스코바르가 총과 돈으로 ‘완고한 양당정치’에 균열을 일으킨 인물이란 게 이유였다. 오죽하면 마약왕을 응원했을까! 이것으로 악당에 대한 얘기는 끝이다. 어떤 경우, 악당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악의 확장에 보탬이 되기도 하기에.
문 닫을 시간이 임박했다. 소나기가 지나고 있었다. 보테로가 기증식에서 했던 발언이 떠올랐다. “메데인을 마약과 폭력과 암살자의 도시가 아니라, 예술과 교육과 진보의 도시로 만듭시다. 메데인은 고풍스럽고 깨끗한 도시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합니다. 평화의 도시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합니다.” 보테로의 기증 후 메데인의 살인율은 95%, 빈곤율은 66% 감소했고 그의 바람은 현실이 되고 있다.
귀국 후 다큐멘터리 〈보테로〉를 보았다. 1932년생인 작가는 스튜디오에 매일 출근해서 그림을 마주하고, 무언가를 배우고, 무언가를 해결하기 위해 골몰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밸런스라며. ‘페인팅에 대한 얘기’지만 ‘세계에 대한 이야기’로 들렸다.
“균형이 모든 것이야. 이쪽을 높이면 저쪽이 내려가지. 그래서 조화와 해결책이란 게 존재해. 완벽하게 그린다는 건 불가능해. 단지 조화를 위해 계속 작업할 뿐이지. 그래서 영원히 그릴 수 있어.”
글·사진 노동효(<남미 히피 로드> 저자·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