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시 연곡면 홍질목길 ‘보헤미안 박이추 커피’ 본점 추출실에서 그는 하루 100~200잔의 드립커피를 추출한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지난여름, 손님들이 북적이는 커피숍 입구에서 과묵하게 앉아 있는 박이추(72) 대표를 우연히 마주쳤다. 박 대표는 손목보호대를 오른쪽 손목에 끼고, 드립커피 주문이 들어오면 부리나케 추출실로 뛰어들어갔다. 허리를 깊게 숙여 신중하게 커피를 내리는 모습에선 ‘커피의 구도자’ 같은 아우라까지 느껴졌다.
7일 시작되는 강릉 커피축제를 앞두고 지난달 15일 오후, 강릉 연곡면 홍질목길 ‘보헤미안 박이추 커피’ 본점에서 박 대표를 다시 만났다. 세속의 영광을 거부하는 은거수행자와 냉철한 생활인 사이에서 그는 마치 한잔의 커피처럼 다채롭고 균형 잡힌 모습을 보여주었다. 관계를 추구하면서도 고독을 선호하고, 커피에 몰두하는 듯싶다가도 자기 삶과 커피 사이에 확실한 선을 그었다.
박 대표는 한국의 1세대 바리스타 중 유일한 현역으로 남아 있는 이다. 강릉이 전국구 커피 도시가 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카페 보헤미안이 연곡면 후미진 길에 뿌리내린 것을 보고 뜻있는 사람들이 강릉 커피축제를 기획했고 박 대표도 매번 상당량의 커피를 무료로 제공하는 등 적극 지원해왔다. 연곡면 본점에서 박 대표는 요즘도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직접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추출한다. “하루에 최소 100잔, 많을 땐 200잔을 만들어요. 커피는 커피이지 돈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손님들이 반갑기도 하고 반갑지 않은지도 몰라요. 하하.”
커피는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1950년 일본 규슈 오이타 작은 마을에서 재일동포 2세로 태어난 박 대표는 어렸을 때부터 이상적인 공동체로서 협동농장을 꿈꾸었다. 1974년 한국으로 와 경기도 포천에 8만2644㎡(2만5000평)의 목장을 일궜고 경기도 광주를 거쳐 강원도 원주 문막에서도 소를 키웠지만 뿌리를 내리지는 못했다. “어느 날, 밤하늘을 바라보며 갑자기 ‘아이고 이제 도시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죠.” 낯선 시골, 땅의 소유권을 둘러싼 복잡한 법적 문제며 사람들과 갈등하는 현실이 그를 오히려 도시로 이끌었다.
한국의 1세대 바리스타 중 유일한 현역으로 남아있는 박이추 ‘보헤미안 박이추 커피’ 대표.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목장을 관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낮에는 매형 회사에서 트럭을 몰고, 밤에는 커피학원에서 공부를 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 혜화동에서 ‘가배 보헤미안’을 시작한 것이 1988년. 어지러운 시대, 거리에 최루탄 냄새가 끊이지 않자 1990년부터 2000년까지 10년 동안은 고려대 인근 지하로 카페를 옮겼다. 이곳이 유명해지자 사람들이 들끓었고, 피로감을 느낀 박 대표는 2000년 평창 진고개로 매장을 옮겼다. 강릉의 한적한 곳에 터를 잡은 건 2003년이었다. 사람을 피해 떠났더니 ‘1세대 커피명인’을 만나려고 사람들이 시골구석까지 찾아왔다. 이제 그의 브랜드 ‘보헤미안’이라는 이름이 붙은 카페는 전국에 6군데에 이른다. 강릉 연곡면 홍질목길 본점, 사천 보헤미안로스터즈 박이추 커피공장, 아이스아레나경기장 인근 보헤미안 경포점(그의 아들 박태철 바리스타가 운영한다), 서울의 상암, 그리고 여의도 두군데다.
“저는 아마 살아 있는 동안은 계속 커피를 공부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커피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커피를 통해 우리가 계속 발전을 하는 거예요.”
박이추 대표가 드립커피를 추출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40대 중후반, 고려대 앞에서 가게를 할 때였다. 커피나무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나무가 죽어버려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손님은 많았지만 간신히 먹고사는 정도였지요. 커피가 그렇게 어려운 건지 몰랐어요. 커피가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는데 서로 뭔가 주고받는 게 아니었어요. 내가 커피에게 무엇을 주더라도 커피가 그 은혜를 나에게 다시 돌려주길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커피는 사람과 동등하게 선물을 주고받는 호혜의 작물이 아니었다. 좋은 원두도 중요하지만 결국 커피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리고 거기에 ‘물’이 조금 거든다. 그는 커피를 수돗물로 추출한다. 서울에서도 하루 전에 물을 받고 윗물을 걷어서 끓인 뒤 커피를 만들었다. “정수기 물로 하면 커피가 너무 부드럽죠. 개성이 드러나는 것은 수돗물 쪽이에요. 물이 너무 깨끗하면 커피에 있는 성분도 제거가 돼버려 진가가 안 나타난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어요.”
박 대표는 어느 날 책에서 ‘맛있는 커피는 당신의 팔자와 운명을 바꾸는 커피’라는 문장을 읽고 놀랐다고 했다. “세상엔 그런 커피가 있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이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그런 커피를 믿지도 않고 찾지도 않아요. 커피가 있고 내가 있죠. 처음엔 내가 아래에 있다가 점점 커피가 우위로 올라가요. 그건 좋지 않아요. 자신을 찾아야죠. 자신을 찾지 못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되는 거예요.”
‘인생의 커피’가 뭐냐고 묻자 박 대표는 활짝 웃더니 ‘보헤미안 믹스’라고 했다. 자신이 만든 커피다. 콜롬비아, 브라질, 과테말라, 케냐 네가지를 섞어 만든 이 커피는 진하면서 부드럽다. “화려하지 않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다고 할까요. 참 불쌍한 커피야 진짜. 하지만 잊어버리고 싶어도 잊어버릴 수가 없는 커피죠.”
보헤미안 믹스. 콜롬비아, 브라질, 과테말라, 케냐 네가지를 섞어 만든 이 커피는 진하면서 부드럽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이제 그는 2025년에 경상북도 울진으로 터를 옮기고자 한다. “커피에 가까워지려는 마음이죠. 지금은 너무 시끄럽고 너무 사람이 많이 오다 보니까 하나는 플러스지만 하나는 마이너스니까요.”
그리고 가장 큰 변화가 있다. 라오스에 땅을 빌려 박이추 커피를 본격적으로 생산하게 된 것이다. 커피를 하는 사람들이 가진 궁극의 꿈이 바로 커피 농장을 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2017년에 묘목을 만들어서 2018년부터 라오스 산에 파나마 게이샤, 케냐, 과테말라 이 세가지 묘목으로 심었어요. 아주 고도가 높은 오지에서 해야 해요. 몇년 동안은 안되었다가 작년에 겨우 450㎏ 정도 수확을 했는데 올해는 800㎏ 정도 나왔어요. 내년이 되면 1000㎏을 넘을 것 같아요.”
젊어서 꿈꾸었던 농장의 꿈이 눈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그는 꿈을 현실로 만드는 데는 충분한 조건이 필요하다고 거듭 말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도 좋지만 경제적인 뒷받침과 밀어내는 힘이 있어야죠. 지혜로 머리를 써가면서 투자해야 하는 것이거든요.” 앞으로는 라오스와 한국을 오가며 커피를 계속 연구, 발전시킬 생각이다. 20년 가까이 살아온 강릉에서 이루게 된 일이다. 그처럼 꿈을 품고 올가을 강릉을 찾을 이들에게 한마디를 부탁했다.
“코로나도 경제적 어려움도 이제 다 잊어버리시고 커피를 마시면서 강릉의 바다와 산도 보고 여행하며 즐기시기 바랍니다. 남아 있는 생을 행복하게 살고 또 자신의 꿈도 이루시길 빕니다.”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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