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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따라 50㎞ 제주 산길을 달렸다, 바나나와 함께

등록 2022-10-15 10:00수정 2022-10-15 11:29

[ESC] 운동
50대 기자의
제주 트레일러닝 참가기

환상 경치 속에서 뛰며 걸으며
‘무사완주’ 목표로 멋진 도전
내년엔 100㎞ 도전해 뛰어볼까
영실 탐방로 계단을 오르는 ‘트랜스 제주 2022’트레일러닝대회 50km 코스 참가자들.
영실 탐방로 계단을 오르는 ‘트랜스 제주 2022’트레일러닝대회 50km 코스 참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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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피니시 라인이다. 남은 힘을 짜내 속도를 올렸다. 결승점은 멋지게 통과하고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나를 앞지르며 추월하려 했다. 순간적으로 승부욕이 발동해 단거리 선수처럼 냅다 내달렸다. 결승점을 나와 경쟁자가 거의 동시에 통과했다. 호흡을 가다듬고 보니 후회막급이었다. ‘기록무시, 무사완주’란 내 나름의 원칙을 마지막 순간에 훼손하고 말았다. 50대 후반 나이에도 부질없는 호승심을 누르는 게 쉽지 않다.

지난 8일 2022 트랜스 제주 국제 트레일러닝대회 50㎞ 코스에 참가했다. 실제 거리는 2㎞가 더 길었다. 출발 시간인 새벽 6시, 어둑한 서귀포 월드컵경기장은 묘한 활기에 휩싸였다. 28개국 참가자 1169명이 뿜어내는 흥분과 설렘과 긴장이 뒤섞여 있었다. 50㎞ 953명, 100㎞ 216명이었다. 462명이 참여한 10㎞ 대회는 따라비오름 일대에서 따로 진행됐다.

돈내코 돌밭길 ‘지옥코스’로

카운트다운이 끝나고 출발 신호가 떨어지자 일제히 함성을 내지르며 튀어나갔다. 사기충천, 고지를 향해 돌진하는 돌격병의 기세였다. 이들 중엔 낙오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 혹시 내가 거기에 속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앞섰다. 이런 대회가 있다는 걸 8월 초에야 알고 덜컥 신청했으니 제대로 준비할 겨를이 없었다. 하프마라톤(21.0975㎞)을 네차례 뛰어봤지만 산길을 달리는 트레일러닝은 첫 대회였다. 무엇보다 50㎞란 거리가 주는 부담이 적지 않았다.

경기장을 벗어나자마자 오르막이었다. 경사가 급해 뛰지 않고 걸었다. 7.5㎞ 지점, ‘치유의 숲’에 이르자 첫번째 체크포인트(CP)가 나왔다. 경로를 점검하고 음료와 간식을 제공하는 곳이다. 50㎞ 코스엔 모두 4곳이 있다. ‘보급’을 마치고 화장실에 다녀온 뒤 다시 길을 나섰다. 오르막이 심한 수로길엔 야자 매트가 깔려 있었지만 비좁고 울퉁불퉁했다.

두번째 체크포인트인 영실탐방로 주차장에 도착하니 21㎞, 4시간1분이 흘렀다. 완만한 경사가 끝없이 이어지며 77m에서 출발한 고도가 1286m로 상승했다. 출발할 때부터 이슬비가 흩뿌리더니 갈수록 빗방울이 굵어졌다. 방수 재킷을 입었어도 한기가 느껴졌다. 허겁지겁 배를 채우고 매점에 들러 뜨거운 커피를 사 마셨다. 트레일러닝에선 이런 것도 가능하다.

영실에서 윗세오름에 이르는 탐방로는 풍광이 수려하지만 길은 ‘계단 지옥’이다. 경사가 급해 뛰기는 어려웠다. 빗줄기 사이로 가끔 햇빛이 반짝였다. 갑자기 와 하는 함성이 들려 뒤돌아보니 거대한 무지개가 걸려 있었다. 참가자들은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트레일러닝에선 이런 즐거움도 있다.

윗세오름 가는 길목 나무 데크 길에서 다시 달릴 수 있었다. 초원처럼 탁 트인 시야가 좌우로 펼쳐졌지만 세찬 비바람이 몰아쳐 경치를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무릎은 시리고 손도 곱아왔다. 장갑을 끼었지만 비에 젖어 쓸모가 없었다. 윗세오름 고도 1700m 표지석에서 50㎞와 100㎞의 코스가 좌우로 갈렸다. 왼쪽으로 표시된 100㎞ 코스를 바라보니 괜히 심란한 마음이 들었다. 추위를 피하려 일회용 은박담요를 두른 이들이 눈에 띄었다. 비상시에 대비해 호루라기, 압박붕대 등과 함께 반드시 지참해야 하는 물품이다. 나중에 들어보니, 저체온증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긴 이들도 있었다.

윗세오름에서 돈내코 가는 길은 내리막이었다. 돌투성이 너덜길은 끝날 줄 몰랐다. 얄밉게 박힌 현무암 돌덩이들은 진흙으로 코팅한 듯 미끄러웠다. 중심을 잃고 넘어지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길이었다. 시야가 어두워 눈을 부릅떴는데도 자꾸 돌부리에 채었다. 오른쪽 엄지발가락이 빠질 듯 아려왔다. 왁자지껄 떠들던 선수들도 말이 없어졌다. 순례자의 행렬 같은 침묵의 행군이었다.

드디어 돌길을 벗어났고 서귀포 시내가 눈에 들어왔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세번째 체크포인트가 나왔다. 이곳을 그토록 기다린 이유가 있었으니, 뜨거운 컵라면을 맛볼 수 있었다. 국물을 넘기고 나니 힘이 솟았다. ‘고생 끝’이려니 했는데 또다시 심한 오르막이었다. 36㎞를 달려 마주친 ‘솔오름’(미악산) 고갯길에 한숨이 나왔다. 팔을 흐느적이며 터벅터벅 걷는 선수들은 패잔병처럼 힘이 빠져 있었다.

조금 지나니 다시 돌밭길이었다. 싱가포르에서 친구 3명과 함께 왔다는 선수는 ‘스톤’이 한국말로 뭐냐고 물으며, ‘돌이 너무 많다’고 고개를 저었다. 철인 3종 경기 50㎞를 완주했다는 30대 중반 선수는 “처음 참석한 대회라 그런지 철인 3종보다 더 힘들다”며 무릎 통증을 호소했다. ‘철인’을 앞질러 한참 달리다 보니 ‘으악’ 비명이 들려왔다. 다시 뒤돌아 갔더니 주저앉은 그가 “발목을 삔 것 같다. 먼저 가라”고 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걸을 수는 있겠다고 했다. 진통제 한알을 건네고 다시 달렸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 ‘철인’도 제한시간 안에 완주했다.

네번째 마지막 체크포인트에서 정신없이 바나나를 입에 욱여넣었다. 아마 하루에 바나나를 가장 많이 먹은 날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 10㎞ 구간은 출발할 때 한번 지났던 길이다. 달릴 수 있는 내리막길이었다. 발가락과 발목, 종아리, 무릎과 허벅지, 쑤시지 않는 곳이 없었지만 그래도 속도를 올리다 보니 피니시 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한라산 영실 입구에서 윗세오름 가는 막바지 오르막길의 임석규 기자.
한라산 영실 입구에서 윗세오름 가는 막바지 오르막길의 임석규 기자.

너그럽고 자유로운 트레일러닝

악천후 속 악전고투였다. 오후 4시21분에 도착했으니 10시간21분을 걷고 뛰었다. 어쨌든 제한시간 14시간30분 이내였다. 전체 참가자 가운데 128번째로 나이가 많았고, 순위는 521위였다. 중간 정도 성적이다. 50㎞ 완주에 성공했으니 100㎞ 출전 자격을 얻었다. 내친김에 내년엔 100㎞에 도전해볼까.

많이 걸었지만 적어도 뛰어야 하는 길에서 걷지는 않았다. 걸어도 되는 길, 뛰어야 하는 길을 누가, 어떻게 판단하냐고? 경사도 몇도 이상이면 걸어도 되고, 그 이하면 뛰어야 한다는 기준 같은 건 없다. 뛰는 사람이 알아서 판단한다. 이것이 러닝과 트레일러닝의 결정적 차이이자, 트레일러닝만의 매력 포인트다.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적어도 걷지는 않았다’고 러너로서 자부심을 드러냈지만, 걷고, 쉰다고 뭐라는 사람 없는 너그럽고 자유로운 스포츠가 트레일러닝이다.

힘들었지만 생각했던 것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제한시간이 길어 무리하거나 기록 욕심내지 않고 자신의 페이스를 지키면 대부분 완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여유롭게 자연과 풍경을 즐기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기록이 2∼3시간 늦어지면 어떤가. 내년엔 더 느리고 느긋하게 달리고 싶다. 비록 그 거리가 100㎞일지라도.

서귀포/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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