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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다니며 내가 받는 호의에 관해 가끔 질문을 받는다. 뭘 어떻게 하면 그렇게 친절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거냐고. 그럴 때마다 반복하는 말이 있다. “내가 절박해 보이는 얼굴이잖아. 좀 없어 보이기도 하고.” 농담 반 진담 반의 말이다. 시기심이 일 만큼 예쁘지도, 피하고 싶을 만큼 험악하지도 않은, 딱 평범한 얼굴. 그 얼굴이 사람들의 경계심을 허무는 게 아닐까.
거기에 더해 절절한 눈빛 레이저로 거절을 힘들게 만드는 기술력도 있다. 도움을 부르는 얼굴과 예의 바른 태도에 더해 호의는 절대 거절하지 않는 미덕까지 갖추었다고나 할까. (오죽하면 지난해 쓴 책 제목이 <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일까.) 여행을 다닐수록 깨닫게 되는 사실이 있다. 내가 세상을 향해 웃으면 세상도 나를 향해 웃어주고, 손을 내밀면 그 손을 잡아준다는 단순한 진리. 우리는 모두 서로의 작은 호의에 기대어 살아가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소한 호의라도 호의에는 어떤 힘이 담겨 있다. 여행이든, 일상이든 계속 밀고 나갈 수 있게 하는, 작지만 옹골찬 힘 말이다.
올여름, 이탈리아 베로나에서였다. 고대 원형 극장 아레나에서 공연하는 오페라 <라트라비아타>를 보기 위해 매표소 앞에 줄을 서고 있었다. 젊은 남자와 나이 든 여인이 다가와 내게 프린트된 종이를 내밀었다. “오페라 티켓 살 거라면 나한테 살래요? 여자친구가 아파서 못 가게 되었거든요. 71유로인데 40유로에 팔게요. 안에 들어가서 표 확인해봐도 돼요.”
순간, 겁이 많아서 의심도 많은 내 생존 본능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내밀었다. ‘아르헨티나에서 부부를 가장한 소매치기에게 당할 뻔했잖아. 게다가 여기는 이탈리아야! 이 사람들은 모자를 가장한 거야.’ 독일인 모자의 태도는 ‘쿨’했다. “어차피 표 환불하러 온 거라서 당신이 안 사면 환불받으면 돼요.” 결국 나는 그 티켓을 들고 창구 직원에게 가서 물었다. “이거 진짜 티켓 맞아요?” 쓱 훑어본 직원이 귀찮다는 듯이 답했다. “티켓 맞아요.” “아니, 자세히 좀 봐주세요.” “나 여기서 20년 동안 표 팔고 있어요. 진짜 맞아요.” 그 순간에도 내 안에서는 일말의 의심이 일렁였다. ‘설마 티켓오피스 직원까지 연루된 고도의 사기는 아니겠지?’ 그들의 선한 얼굴을 믿고 싶었다. 결국 그에게서 티켓을 샀다. 그의 어머니(라는 여성)가 돈을 받아 챙겼다. 젊은 독일인 쿤씨가 웃으며 말했다. “오늘 밤에 봐요. 우리 옆자리잖아요.” 나도 웃으며 답했다. “시 유 투나이트.”
약간의 긴장 어린 설렘이 따라왔다. 과연 이 표가 진짜일까. 쿤씨 모자를 볼 수 있을까. 그날 밤 9시, 저렴한 가격에 ‘득템’한 표를 들고 극장에 들어섰다. 내 의심이 무색하게 옆자리에는 이미 그들이 앉아 있었다. 인사를 나누는 순간, 주변의 공기가 술렁이는 것 같았다. 한낮의 열기를 식히는 산들바람이 귓전을 스치고, 밤하늘은 짙푸르게 물들어가는 여름 저녁이었다.
로마 시대인 3세기에 지어져 3만명을 수용하는 원형 경기장은 그 자체로 완벽한 배경이었다.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날 밤의 <라트라비아타>가 유난히 훌륭하게 느껴진 건 원형 극장의 분위기에 더해 옆자리 쿤씨 가족 덕분이었다. 쿤씨가 긴 줄에 서 있던 많은 이들 중에서 내게 다가온 건 내 무던한 얼굴 때문이었을까. 오페라가 끝난 뒤 나는 그에게 진심을 담아 인사했다. 덕분에 참 행복한 밤이었다고.
여름밤의 추억을 안고 베로나를 떠나 향한 곳은 메라노. 메라노는 유럽의 유서 깊은 휴양 도시였다. 300년 전부터 유럽 귀족들이 온천욕과 병 치료를 위해 찾아오던 곳. 단골 방문객 중에는 프란츠 카프카나 에즈라 파운드,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황후(애칭은 ‘시시’)도 있었다.
강을 끼고 산을 두른 도시에는 윤택함이 흘렀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아이들 뛰어노는 소리가 도시에 생기를 더했다. 산과 온천이라니 얼마나 좋은 합인가. 낮에는 주변을 걸어 다니고, 저녁에는 온천에서 몸을 풀었다. 15개의 실내 풀과 10개의 실외 풀을 가진 메라노 온천은 거대하고 아름다웠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여행의 피로가 말끔히 풀어졌다.
게다가 메라노는 와인으로도 유명했다. 주변에 수많은 와이너리가 있고, 도심에도 와인숍이 많았다. 낮에도 밤에도 마실 이유가 충분했다. 낮에는 외곽의 와이너리에서, 밤에는 도심의 와인숍에서 애주가 흉내를 내며 와인을 즐겼다. 네댓가지 와인을 시음해도 10유로(약 1만4천원)면 충분했다. 천국의 보상이 있다면 이런 게 아닌가 싶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으로 뽑혔던 트라우트만스도르프성 정원.
오스트리아
황후의 겨울 관저였던 성을 찾아간 날이었다. 성은 이제 7㎞의 산책로를 지닌 정원이 되었다. 만발한 여름꽃들의 짙은 향기에 사로잡혀 정원을 거닐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으로 뽑혔다는 정원은 매혹적이었다. 세심하게 설계된 정원은 노약자와 장애인의 접근성도 좋았고, 아이들도 생태와 환경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정원을 거닐 수 있다니 뜻밖의 선물 같았다. 산책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마침 정원의 잡초를 뽑는 젊은 여성과 마주쳤다. 나도 모르게 인사말을 건넸다. “고마워요. 이렇게 멋진 정원을 만들어줘서.” 그 순간, 그녀의 얼굴이 꽃처럼 환하게 피어났다. 보는 사람이 쑥스러워질 만큼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 그녀가 답했다. “나야말로 고마워요. 그런 말을 해줘서.”
나의 여행은 그녀의 일상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일종의 ‘침입자’인 내가 그녀에게 친절을 바랄 수는 없다. 그들의 일상에 호의를 표현하고, 그 대가로 또 다른 호의를 그들로부터 받는 것. 친절을 바라지 말고 호의를 교환하며 살아간다면 우리의 일상도, 여행도 건너가기에 좀 더 수월하지 않을까. 말 한마디로 서로에게 미소를 머금게 한 그 순간처럼.
메라노는 질 좋은 와인이 나는 곳이기도 하다.
폐허가 된 성을 개조한 산악 박물관은 건물 자체가 인상적이다.
3주간의 이탈리아 여행의 마지막 도시는 볼차노였다. 이 도시에 온 이유는 딱 하나. 라인홀트 메스너의 산악 박물관 때문이다. 돌로미티를 트레킹하는 내내 나는 그 남자에 대해 생각했고, 이번에는 꼭 산악 박물관을 찾아가겠다고 마음먹은 터였다. ‘내려올 산을 왜 올라가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는 카레차 호수로 산책을 가고, 나는 혼자 박물관으로 향했다.
산악 박물관답게 가벼운 등산(?)을 해야 박물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니, 박물관도 이렇게 멋지게 만들 일이야?” 황폐했던 성을 개조한 박물관은 공간부터 근사했다. 성 안과 밖을 넘나들면서 각기 다른 주제의 공간들을 시계 방향으로 돌아보게 되어 있는데, 박물관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었다. 라인홀트 메스너는 자신이 나고 자란 남티롤 지역에 여섯개의 메스너 산악 박물관을 세웠다. 그 중심이 볼차노의 산악 박물관이다.
산이 주는 위로를 알게 된 후 한동안 열심히 산악 문학을 찾아 읽던 시기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메스너의 <죽음의 지대>, <벌거벗은 산>, <검은 고독 흰 고독> 같은 책은 충격적이었다. 이 사람은 등반가가 아니라 철학자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무산소로, 알파인스타일로, 단독 등정을 하며 자신의 한계는 물론 인류의 한계를 끝없이 부수고 확장해간 그라는 인간을 더없이 존경하게 되었다. 그 시절 내 꿈은 암벽 타는 남자를 만나 함께 세계의 바위를 오르는 거였다.
다행히도 찰나의 꿈을 꾸다가 곧 정신을 차렸다. 일단 나는 암벽 등반에 소질이 전혀 없었다. 잘하는 거라곤 오직 비명을 질러대느라 인수봉 주변을 소란스럽게 만드는 일뿐이었으니. 아무튼 단독자로 우뚝 선 그를 그렇게나 존경해왔으면서도 나는 이 산악 박물관에 대해 사전 지식이 전혀 없었다. 그저 본인이 쓰던 등산 장비나 전시해 놓은 곳일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메스너에 대해 너무 몰랐다. 이 산악 박물관은 남티롤 지역의 역사에서 시작해 인류 등반의 역사, 자신은 물론 위대한 등반가들의 삶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과 산의 관계를 그야말로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철학적인 박물관이었다.
내 발걸음이 가장 오래 멈춘 곳은 가장 작은 방이었다. 산을 오르다 세상을 떠난 산악인들의 사진을 모아 놓은 곳이었다. 그 방에는 함께 낭가파르바트를 등반하다가 눈사태를 만나 죽은 동생 귄터 메스너의 등산화와 피켈(설산 등반용 지팡이)이 있었다. 그의 시신은 실종 후 35년이 지나서야 발견되었고, 메스너는 그 낡은 등산화를 보고 동생임을 알아차렸다. 라인홀트 메스너는 이 등반 후 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비난을 받았고, 그를 비난한 등반가들을 고소하기도 했다.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의 터널을 그는 통과했을 것이다. 그 방에서는 밥 딜런의 ‘블로인 인 더 윈드’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동생이 가장 좋아한 노래였을까. 형제가 함께 산을 오를 때마다 즐겨 불렀던 노래였을까. 나는 낡은 등산화를 바라보며 벽에 기대어 그 노래를 들었다. 높은 산에 오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한때는 나도 동경했다. 지금은 멀리 있어 찾아가기 힘든 높은 산보다 가까이 있어 언제나 오를 수 있는 낮은 산을 더 좋아한다. 그럼에도 내 가슴을 뛰게 하는 건 언제나 이런 이들이다.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계속 나아가는 소수의 사람. 실패하거나 죽거나, 쓸쓸히 후퇴한다 해도, 오직 자기 자신과 싸우며 오르고 또 오를 뿐인 사람들. 삶의 작은 문턱에서도 비틀거리는 나 같은 이는 저 거대한 산을 향해 전진하는 사람들을 동경할 수밖에.
라인홀트 메스너의 동생 귄터의 등산화와 등반 중 세상을 떠난 산악인들.
내가 책을 통해서만 접했던 위대한 산악인들의 도전과 실패를 잠시나마 엿볼 수 있는 애틋한 시간이었다. 게다가 ‘덕계못’(덕후는 계를 못 탄다) 속설을 깨고, 박물관에서 라인홀트 메스너와 딱 마주치는 행운까지 찾아왔다. 이 위대한 남자와 사진이라도 한장 남기고 싶다는 욕망이 내게도 있었다. 그런데도 “여기서 당신을 만나서 무척 기쁘다”고 겨우 한마디를 건네고 돌아섰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사진 찍자고, 사인해달라고 할 테니 얼마나 피곤할까. 나라도 그 피곤함을 덜어주고 싶었다. 내가 그의 일상에 건네는 작은 호의였다.
글·사진 김남희 여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