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스로이스가 지난해 한 일본인 사업가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팬텀. 롤스로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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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티브이(TV) 광고나 제품의 모델명에서 ‘비스포크’라는 단어를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거다. 고급스러움을 내세우는 최상위 모델을 뜻하기도 하고 사용자의 입맛에 맞춰 제품을 재구성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물론 틀린 뜻은 아니다. 하지만 비스포크의 명확한 뜻을 알고 싶다면 방구석 어딘가 방치된 어학 사전을 펴보자. 비스포크(bespoke)는 ‘Been spoken for’의 줄임말로, 본래 뜻은 ‘말하는 대로’다.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제작해주는 맞춤형 생산 시스템을 말한다. 사용자가 원하는 쓰임에 따라 제품을 손보기도 하고, 취향에 맞춰 고급 옵션을 넣기도 한다.
벤틀리가 중동 한 소비자의 요청으로 수작업 매사냥 키트, 횃대 등을 넣은 뮬리너. 벤틀리 제공
사실 비스포크 열풍은 이미 자동차 업계에서도 꽤 진행이 된 이슈다. 소품종 대량생산이 중심인 제조업의 꽃, 자동차에서 비스포크가 가능하냐고 묻는 이들도 있을 거다. 소품종 대량생산의 원리에 따라 기업은 제품당 평균 비용을 줄일 수 있고 소비자는 기업이 제시하는 한정된 가짓수의 품목을 이른 시일 내에 저렴한 가격으로 만날 수 있다. 여기까진 우리가 알고 있는 대중 브랜드의 이야기다. 최고급을 외치는 자동차 제조사들엔 남들과는 다른, 차별화된 서비스가 필요했다. 제품으로만 승부하기엔 시장은 이미 포화상태였고 소비자들 역시 취향과 기호가 명확해지고 개성과 경험과 같은 감성적 만족을 갈구했다.
완성차 업계에서 가장 유명한 비스포크 브랜드로 주저 없이 롤스로이스를 꼽을 수 있다. “롤스로이스를 소유하는 기쁨은 차를 인도받을 때가 아니라 어떻게 주문할지 고민할 때부터 시작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비스포크를 대하는 롤스로이스 태도는 진심 그 이상이다. 여느 자동차의 옵션을 선택하는 수준이 아니다. 비용을 지불할 능력만 된다면 원하는 무엇이든 넣을 수 있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다. 롤스로이스는 사용자가 원하는 게 아닌 기본으로 제공하는 옵션만 해도 엄청나다. 외장 색상은 4만4000여 가지에 이르고 가죽 색상은 12가지, 심지어 나무 패널만 6가지 중에 고를 수 있다. 여기에 탄소섬유라는 선택지까지 더해진다면 그 수는 헤아릴 수 없다. 여기서만 선택해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플 것 같지만 어떤 사람들은 남들이 선택할 수 없는, 그리고 나만의 것을 만들고 싶어한다.
예를 한 번 들어볼까? 지난해 6월 롤스로이스는 일본인 사업가 마에자와 유사쿠의 의뢰를 받아 세상에 단 하나뿐인 팬텀을 제작했다. 일본 전통 도자기 수집가로도 유명한 그를 위해 자동차 외부를 도자기의 녹색과 크림색 유약을 연상케 하는 투톤 컬러로 칠하고, 실내는 에르메스 디자이너와 함께 완성했다. 실내 안쪽은 물론 운전대와 기어 레버, 둥근 컨트롤러에 에르메스 가죽을 휘감았다. 글러브 박스 덮개에는 두 브랜드의 협업을 상징하는 글자(Habillé par Hermés Paris)를 새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안 그래도 고급스러운 팬텀의 실내가 더욱 고급스러워졌다. 아쉽게도 이 차의 가격은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제작비를 통해 약간 유추는 가능하다. 팬텀 에르메스 에디션의 당시 제작비는 약 3억 엔, 우리 돈으로 31억원에 달했다. 팬텀 3대 값이다.
롤스로이스의 비스포크가 사치의 끝판왕이라면 벤틀리의 비스포크는 파격 그 자체다. 벤틀리의 비스포크를 담당하는 모델인 뮬리너는 기존 소비자들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들을 보여준다. 그 대표적인 예가 매사냥 키트다. 매사냥을 즐기는 중동 한 소비자의 요청으로 만들어졌다. 매사냥 키트는 뮬리너 팀이 수작업으로 제작했다. 두 칸으로 구성된 박스에는 음료수 케이스, 컵, 담요, 수건은 물론 새를 추적할 수 있는 지피에스(GPS) 장치, 망원경, 눈가리개, 장갑 등이 담겨 있다. 매가 편히 쉴 수 있는 횃대도 있다. 조수석 대시보드에는 매 그림이 새겨져 있는데, 고유 커팅 과정을 거친 430개의 재료로 9일간의 수작업으로 완성했다. 이외에도 뮬리너의 길이 1m를 늘여 4인승을 6인승으로 만들기도 했다. 꼭 세상에 없는 걸 만들어내야 직성이 풀리는 브랜드 같다.
블랙핑크 제니가 좋아하는 마이센블루 색상이 눈에 띄는 포르쉐 타이칸 4S 크로스 투리스모 포 제니 루비 제인. 포르쉐 제공
최근 국내에서도 비스포크 자동차와 관련한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12일 포르쉐는 ‘타이칸 4S 크로스 투리스모 포 제니 루비 제인’ 행사를 열었다. 인기 가수인 블랙핑크의 제니가 그녀의 꿈과 아이디어,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해 디자인한 자동차를 공개한 것. 제니가 좋아하는 마이센블루 색상과 직접 디자인한 제니 루비 제인 로고가 특징이다. 제니의 반려견인 포메라니안 쿠마를 위한 차량용 블랙 펫캐리어 같은 디테일도 챙겼다. 이번 공개를 두고 포르쉐도 비스포크 프로그램이 있는지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았다. 놀랍게도 포르쉐는 자동차 회사 최초로 1986년 자동차 맞춤 전문 부서인 스페셜 위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지금은 이름을 바뀌어 ‘익스클루시브’다. 포르쉐 익스클루시브 역시 롤스로이스나 벤틀리와 마찬가지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차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포르쉐는 이번 제니 루비 제인 에디션을 통해 개인화 프로그램을 더욱더 활성화할 계획이다.
그런데 보통의 소비자라면 여기서 문득 실질적인 걱정이 들 수 있다. 세상에 하나뿐인 자동차, 사고가 나거나 파손되면 어떻게 처리될까? 차를 다시 만들어야 할까? 그럴 필요는 없다. 대다수의 브랜드가 여분을 만들어 행여 발생할 수 있는 사고나 파손에 대비한다. 대비용 부품이 상할까 봐 온도와 습도를 유지를 위한 시설이 있는 자동차 제조사도 있다. 비싼 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김선관(자동차 칼럼니스트)